기억세포를 지키려는 연인들의 황당무계한 도피 행각

하찮은 건망증일지라도 기억의 상실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때로 망각의 기능은 매우 긍정적이다. 망각은 정신적 고통에 대한 매우 효과적인 마취제다.

다사다난한 삶의 고비들을 하나 둘 넘기다 보면, 잊고 싶은 기억이 있고, 결코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 생기게 마련이다. 실연의 아픔을 제대로 겪어 본 사람들은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워 송두리째 잊어버리기를 소망한다.

만약 아픈 기억만을 선택적으로 망각할 수 있다면, 누군들 그런 정신적 천국을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세상 사는 게 어디 그렇게 간단한가.

아프지만 또 그만큼 소중한 기억은 우리를 갈등에 빠트린다. <휴먼 네이쳐>에 이은 미셀 공드리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이런 얼토당토않은 소망을 과학적으로 실행하는 한 연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과거를 잊어줘, 기억을 돌려줘

<이터널 선샤인>의 원제는 'Eternal Sunshine of Spotless Mind'이다. 알렉산더 포프의 시구에서 따온 이 문구는 '흠 없는 마음에 비추는 영원한 햇살' 쯤으로 풀이되는데 정신의 흠결을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지만 추억이 남긴 잔재에 대한 미련 때문에 고뇌하는 사람들을 그린 영화와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주인공 조엘(짐 캐리)은 여자친구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이 자신과 헤어진 후 자신에 관한 모든 기억을 정신 치료 과학자인 미어즈위크 박사의 시술로 모두 제거했음을 알고 분노와 절망에 빠진다.

미어즈위크 박사가 운영하는 라쿠나 회사를 찾은 조엘은 클레멘타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뇌 속에서 클레멘타인과 관련된 기억들을 지워줄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시술사들이 집으로 찾아오고 일단 삭제 과정이 시작되자,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잊고 싶어하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되고, 그 때부터 자신의 뇌 속에 존재하는 기억 속의 클레멘타인을 데리고 도망치기 시작한다.

유일한 방법은 클레멘타인과 관계 없는 기억들 속으로 그녀를 끌고 도망치는 것이다. 뇌 속에서 벌어지는 이 어처구니 없는 도주 행각은 시술사들의 집요한 추적과 더불어 점점 복잡해져만 간다.

데뷔작 <휴먼 네이처>에서 걸출한 괴짜 시나리오 작가 찰리 카우프만과 조우했던 감독 미셀 공드리는 두 번째 영화에서 재차 카우프만과의 공동작업을 선택했다.

뷔욕의 뮤직비디오 연출자로 더 유명한 공드리가 추구하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초현실적인 세계가 카우프만의 세계관과 맞아떨어진 까닭이다.

카우프만의 야심찬 프로젝트는 감정을 조절하는 인간의 뇌를 해부하는 것이다. 카우프만의 이름을 알렸던 각본인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말코비치의 뇌 속을 제 집 드나들 듯 하던 주인공들을 생각해 보면, <이터널 선샤인>에서 보여주는 뇌 속 기억의 이너 스페이스 탐험 또한 그리 낯선 설정만은 아니다.

다만 짐 캐리가 연기하는 조엘 스스로가 자신의 뇌 속을 탐험한다는 점 만이 다를 뿐이다. '잊은 것으로부터 세상은 잊혀진다'는 포프의 시구처럼 뇌 속의 기억을 지우고 되찾으려는 주인공들의 소동극은 사랑에 대한 인간의 행동양식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명불허전 짐 캐리

내 머리 속에 지우개가 있는 것도 아닐진대, 잊고 싶은 기억을 제 맘대로 지울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다니. 설정만으로는 코웃음 칠만한 코미디를 연상할 법도 하다.

그러나 <이터널 선샤인>은 황당무계한 이야기 전개 속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영화다. 미셀 공드리의 전작 <휴먼 네이처>가 야만성에 대한 인간의 이중적 태도를 유쾌한 방식으로 조롱하며 시종일관 가벼운 분위기를 유지했던 영화라고 하면, <이터널 선샤인>은 그러한 유머에서 한 발짝 나아간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관객들에게 던져준다.

영혼의 짝이라는 낭만적인 관념 뒤에 숨겨져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실제로 얼마만큼의 책임감과 인내심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기쁨과 슬픔, 고통과 즐거움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실제로 동전의 양면처럼 떨어질 수 없는 인간사의 일부라는 사실을 영화는 역설한다.

기억 세포를 탐사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연인들의 도피 행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인생과 사랑에 대한 묵직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특히 어리숙하고 소심하며 순진한 남자 주인공 조엘 역을 맡은 짐 캐리는 이 영화가 “자신이 출연한 작품 중 최고”라고 흡족해 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동급 최강의 연기를 보여준 <맨 온 더 문>에 비견될만큼 출중하다. 항상 과장된 제스처와 표정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형성해 온 짐 캐리는 <이터널 선샤인>에서 과장된 캐릭터 이상의 드라마 연기로도 보는 이를 끌어들일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이 영화에서 분열증 캐릭터의 대가인 짐 캐리의 역할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다름 아닌 짐 캐리의 상대역인 클레멘타인으로 분한 케이트 윈슬렛이다.

대중적으로는 <타이타닉>의 히로인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는 케이트 윈슬렛이 이 영화에서 맡은 캐릭터는 과거 피터 잭슨과 함께 작업했던 <천상의 피조물들>에 등장하는 과대망상증 여고생을 떠올리게 한다.

괴상한 머리스타일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괴팍한 성격에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여성으로 등장하는 케이트 윈슬렛은 과묵하고 어딘지 억눌려 있는 듯한 짐 캐리의 캐릭터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두 배우의 기막한 앙상블만으로도 '영원한 마음의 햇살'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