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에 내려앉은 가을의 절정을 보라

오랜 세월 동안 온갖 사연을 안고 유장히 흐르던 남한강이 잠시 숨을 고르는 충주호. 한반도 깊은 곳에 자리해 ‘내륙의 바다’로도 불리는 충주호를 찾아가는 길은 언제나 푸근하고 넉넉하다.

중앙고속도로 남제천 나들목으로 나와 호수를 향해 달리다 보면 가을에서 겨울 문턱으로 들어서는 아름다운 호반의 정취가 두 눈에 들어온다.

볼거리와 즐길거리 다양한 충주호

벚나무 가로수에서 떨어지는 붉은 나뭇잎이 빗금을 긋는 산모퉁이를 몇 굽이 돌아가면 후삼국 혼돈 시대에 통일의 꿈을 키워나가던 영웅을 만나게 된다.

바로 몇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의 벽란도 포구를 재현한 촬영장이다. 지금도 1만2,000평의 부지엔 고려 수군의 관아와 초가집, 망루 등 20여 동의 가옥, 그리고 선박들이 그대로 남아 여행객들을 1,000년 전으로 안내한다.

왕건촬영장 지척에 있는 교리관광단지의 청풍랜드는 충주호의 역동성을 한번에 즐길 수 있는 ‘레포츠의 메카’. ‘거미인간’의 등반도 구경할 수 있는 인공암벽을 비롯해 국내 최대 높이의 번지점프 타워와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빅스윙’, 조종사의 비행기 탈출 원리를 이용한 ‘이젝션 시트’ 등 레포츠 마니아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한 시설이 두루 갖춰져 있다.

고함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뛰어내리는 번지점프도 기억에 남지만, 수상 경비행기를 타고 충주호반을 둘러보는 ‘하늘 여행’도 환상적이다.

충주호는 이런 다양한 재미를 즐기면서도 역사의 무게도 더불어 느낄 수 있는 호반이다. 조선시대까지 제천의 중심지였던 청풍은 제법 유서 깊은 고을로서 적지 않은 유물과 유적이 있었다.

1980년 중반에 충주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한 제천 청풍면의 유적들을 옮겨 놓은 청풍문화재단지 전경.

마을의 관문인 팔영루 앞엔 역대 관리들의 송덕비가 즐비했고, 강가 언덕엔 날아갈 듯한 한벽루(보물 제528호)가 있어 시인묵객을 불러들이곤 했다.

그러다 1985년 충주댐이 생기면서 일대가 물에 잠기게 되자 유적들을 옮겨놓고 옛 고을을 재현한 것이 바로 청풍교 너머에 있는 청풍문화재단지.

조선시대 청풍의 영화를 기억하는 제천 사람들은 청풍 고을의 이름을 따서 충주호 중에서 이 주변을 특별히 ‘청풍호’라 부르며 아낀다.

또 뒤쪽 언덕 기슭엔 SBS 무협사극 ‘대망’ 오픈세트도 세워졌으니 충주호는 이래저래 시간 여행하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단지엔 아쉽게도 마을에 사람이 기거하지 않지만 처마 밑과 부엌엔 지게ㆍ키ㆍ멍석ㆍ광주리ㆍ사기그릇ㆍ놋숟가락 등 조상들의 손때가 묻은 옛 살림살이가 가지런히 정리돼 있어 어릴적 고향의 추억도 떠올릴 수 있다.

청풍문화재단지를 들른 뒤 다시 청풍교를 건너가 우회전하면 호젓하게 충주호의 비경을 살필 수 있는 능강리 지구다. 담쟁이덩굴 엉겨붙은 바위가 길을 안내하는 초입서부터 가슴은 기대감으로 설렌다.

산허리를 감도는 꼬불꼬불한 길도 맑은 호수와 제법 잘 어울린다. 능강리에 이르러 호수를 따르던 길에서 벗어나 낙엽 수북한 산길을 얼마쯤 오르면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정방사(淨芳寺). 얼마 전 목조관음상 뱃속에서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복장기가 나와 학계의 관심을 끌기도 했던 작은 절집이다.

샛노란 은행잎이 뒹구는 법당 뜨락에서 내려다보면 발아래 펼쳐진 잔잔한 호반 너머로 월악산(1,094m)이 높이 솟았고, 첩첩이 펼쳐진 백두대간 산줄기가 장쾌하다.

천하 제일의 흥취인 장회나루 뱃놀이

정방사를 나와 고향 같은 산골마을들을 지나면 옥순대교다. 바람은 차갑지만 충주호의 속살이면서 단양팔경에도 속하는 옥순ㆍ구담봉을 훔쳐보는 즐거움에 마음은 오히려 넉넉하다.

이곳까지 와서 천하 제일의 흥취로 꼽혀온 장회나루 뱃놀이를 지나칠 수는 없다. 장회나루를 떠난 유람선은 갖가지 기묘한 암봉 사이를 이리저리 감아 돌며 잔잔한 수면을 헤쳐나간다.

절벽 아래 제비집처럼 자리잡고 있는 정방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아담한 절집이다.

거북을 닮은 구담봉(龜潭峰), 그리고 희고 푸른 바위가 비온 후의 죽순 같다는 옥순봉(玉筍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멀어진다. 창공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 형상의 제비봉도 날렵하다.

비록 기생의 가야금 소리가 흥을 돋워주는 황포돛배가 아니라 해도 어찌해서 선인들이 장회나루 뱃놀이를 천하제일의 흥취로 여겼는지 알만하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도학자인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재직할 때 단양의 명기 두향(杜香)과 이곳을 배경으로 나눈 사랑 이야기는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퇴계가 단양에 온 지 10개월만에 풍기군수로 발령이 나면서 퇴계와 두향의 사랑은 끝났고 말았다. 퇴계가 단양을 떠나자 두향은 구담봉 앞 강선대가 내려다보이는 강 언덕에 초막을 짓고 은둔생활을 했고, 나중에 퇴계가 안동에서 타계하자 두향은 강선대에 올라 거문고로 초혼가를 탄 후 자결했다고 전한다. 스물 여섯의 짧은 생이었다.

여행정보

숙식

교리관광단지의 청풍리조트호텔(043-640-7000)은 호수 전망이 좋은 숙박지다. 주변에 청풍랜드(043-648-4151), 청풍여관(043-648-0021) 등의 숙박시설이 있다. 또 능강리 지구엔 전망 좋은 언덕에 자리잡은 유럽풍의 휴식공간인 ES리조트(02-508-0118 www.esresort.co.kr)를 비롯해 금수산모텔(653-8254), 능강리민박(043-653-7997) 등의 숙박시설이 있다. 민물고기 매운탕이나 토종닭 요리 등을 파는 식당도 여럿 있다.

교통

중앙고속도로로 남제천 나들목(청풍 방면)→82번 지방도→왕건촬영장→교리국민관광단지→청풍교→청풍문화재단지. 다시 청풍교를 건너 우회전해 정방사→옥순대교→36번 국도(단양 방면)→장회나루 선착장→충주호 유람선.




글·사진 민병준 여행작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