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부활을 꿈꾸며 劍을 든 마지막 왕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는 갈라진 세계의 통합을 소망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 묵직한 울림을 남긴 불후의 명곡이다.

'갈라진 땅의 친구들'을 다시 만나게 될 날을 노래하는 의미심장한 가사는 발해의 역사와 분단의 현실을 절묘하게 연결시킨다.

<무영검>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시대는 이 가려진 역사의 한 페이지다. <무영검>은 외세에 의해 사라진 한민족의 제국 발해를 무대로 가공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최근 유행하고 있는 과거사 되돌아보기나 발해의 역사적 의미 발굴 따위의 고매한 목적의식 하에 만들어진 건 아니다.

무협 장르를 스크린에 펼쳐보이기 위해 과거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고, 발해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비로운 소재로 선택된 것이다.

발해 원정대-왕의 귀환

때는 927년, 발해를 침공해 '동란국'이라는 신흥 국가를 건설한 거란은 왕통을 이을 발해 왕족의 씨를 말리려 한다. 본래 발해인이었으나

왕족에게 일가를 몰살당한 군화평(신현준)과 그의 수족인 여장수 매영옥(이기용)이 척살단이라는 조직을 꾸려 발해 왕족 죽이기의 선두에 선다.

외세에 점령당해 질곡의 삶을 사는 옛 발해의 영화를 되찾을 마지막 희망은 어린 시절 정쟁에 휘말려 쫓겨났던 왕자 대정현(이서진). 발해 재건을 위해 목숨을 내 건 당대 최고의 무술 고수인 연소하(윤소이)가 대정현의 보호 임무를 띄고 파견된다.

이 때부터 복수의 화신이 된 군화평과 발해의 부활을 꿈꾸는 대정현 일행의 치열한 추격전이 전개된다. <무영검>의 스토리는 복수와 사랑, 패망한 자의 명예회복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무협 드라마의 그것을 따라간다.

사멸한 제국의 왕이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새로운 제국의 기틀을 세운다는 줄거리는 판타지 서사극 <반지의 제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반지의 제왕>의 제작사인 뉴 라인 시네마가 사전 제작 단계부터 공동 제작사로 참여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뉴 라인 시네마가 참여한 최초의 해외 프로젝트로 알려진 <무영검>은 한국적 무협 액션이라는 불모의 장르를 개척하려는 야심의 산물이다.

전작 <비천무>에서부터 무협 장르의 정복을 꿈꿨던 김영준 감독은 홍콩의 마옥성 무술감독을 기용해 정통 무협 액션의 기본을 만들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어설픈 흉내내기 수준이었던 전작의 실패를 뒤로 하고 5년 간 와신상담한 결기가 액션 장면 곳곳에 배어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극강의 무공을 자랑하는 여성 무사인 연소하와 매영옥의 결투 장면이다.

거친 남성들의 액션에 견줄만한 두 여걸의 대결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액션의 맵시를 창조한다. 언어 소통이 원활치 않은 홍콩 무술감독과 중국 스태프들을 이끌고 이 정도 장면을 연출했다면 그 역시 평가해줄 만하다.

표면적으로 무협 액션을 표방했지만 <무영검>은 동서고금의 스펙터클 서사 액션 대작들을 골고루 섞어 놓은듯한 서사 액션의 종합선물세트다.

영화는 제대로 된 액션 연출을 위해 거의 모든 요소를 희생하는 과단성을 보인다. 이것이 영화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볼거리로서 액션에 관객의 시신경을 붙잡아둘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보여줄 만한 액션의 레퍼토리가 모두 소개된 뒤부터 영화가 서서히 지루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액션을 위해 희생된 것

액션을 향해 시선이 흩어질 때쯤 주의를 끄는 것은 인물들 사이의 로맨스다. 냉혈한 복수의 화신 군화평을 흠모하는 매영옥의 연심과 대정현에게 보이는 연소화의 무조건적인 충성심도 투박한 드라마에 윤기를 더하기 위한 극적 장치다.

"검은 죽이기 위해 드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드는 것"이라는 연소화의 말이 로맨스와 무협의 조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경공술을 부리는 무술 고수들 마냥 캐릭터와 감정도 붕붕 하늘을 날아다녀 인물들의 감정 교환에 동감하기는 쉽지 않다.

과장이 용인되는 것은 무협 액션이지 드라마와 캐릭터의 감정은 아니다. 대담한 구상과 시각적인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풀었다 죄는 이야기꾼의 자질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한국 무협 액션의 경지를 개척하겠다는 투지에 불타는 김영준 감독의 프런티어 정신은 높이 살 만하다. <무영검>은 무협 액션을 시도했던 숱한 실패들을 보상할 작은 성공으로 기록될만하다.

그러나 공들인 액션 장면과 허술한 드라마 사이의 격차는 너무 확연하다. 무협 액션의 기본 꼴을 갖추었으나 이야기와 볼거리가 조화를 이룬 한국적 무협 액션의 모범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