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주고 약 주기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마다 ‘학생부’라는 곳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학생부라는 이름은 참 얄궂기도 하다.

학생부라는 이름만으로는 결코 그곳의 정체를 쉽게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대마다 차이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에서 평균적인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학생부를 ‘강도 높은 체벌이 행해지던 곳’으로 기억하고 있으리라. (제발 요즘이야 그렇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학교마다 가장 험악한 인상의 선생님들이 학생부 담당교사이기 마련이었다. ‘너, 학생부로 와’라는 말을 달가워했을 학생이 과연 있었을까.

이름이 학생부이면서도 학생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 곳이 바로 학생부였던 것이다. 학교에 학생부가 존재하는 이유는 아마도 ‘학생들의 탈선 방지 및 선도’를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언제나 유형, 무형의 강압과 폭력에 의해서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곳의 이름이 ‘체벌실’이 아닌 학생부인 것은 이상한 일이다.

또한 학교마다 ‘상담실’이란 곳도 있었다. 그곳에는 주로 교사 경력이 오래된 중년의 여교사들이 상주하고 있었는데, 학생부와 마찬가지로 그 이름이 부적절하긴 마찬가지였다.

건국 이래 대체로 대한민국 학교의 상담실에는 상담이 부재했다. (역시 제발 요즘이야 그렇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개인적으로 학창시절 6년 동안 단 한 번도 상담실에서 상담이란 걸 받아본 적이 없다. 주변의 친구들 중에서도 상담실을 찾아 도움을 받았다는 증언을 전한 예는 없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상담을 받아야 할 고민이나 걱정거리가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닌데 말이다. 중고등학교의 상담이란 곧 ‘입시상담’이었다.

자신의 시험점수로 갈 수 있는 대학이 어디일까, 교사와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고 심각한 얘기를 나누는 경우는 거의 그때뿐이었다.

학생부가 공공연히 ‘체벌실’로 여겨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상담실은 그저 ‘여교사 휴게실’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애석하게도 ‘상담’이란 우리에게 결코 친근하거나 친숙한 단어가 아니다. 우리는 상담이라는 말에 쉽게 여성잡지에 실려 있는 낯간지럽고 시시콜콜한 (대개는 그 진위가 의심스러운) ‘Q&A’나 ‘가정폭력 상담’, ‘범죄신고 상담’, ‘정신과 상담 치료’ 등의 부정적인 단어들을 떠올린다.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많은 경우 진정한 상담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어른이 된다. (중고등학생의 상담이 ‘입시상담’이라면, 대학생의 상담이란 곧 ‘취업상담’인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과연 좋은 상담이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바람직한 상담이란 무엇일까.

물론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일정한 자격을 갖춘 전문 카운슬러에게 상담을 받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의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교훈이 되어준 충고나 조언은, 무엇보다 우리를 진심으로 아끼고 걱정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좋은 상담의 첫째 조건은 무엇보다 카운슬러의 ‘애정 어린 관심’인 것이다.

자신의 내밀한 고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에 대해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꽤 까다로운 조건 하에서만 성립될 수밖에 없다.

누구도 자신의 고민이 함부로 취급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담실’이란 문패를 달아놓았다고 해서 무턱대고 그 안에 들어가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결코 흔치 않다.

카운슬러는 무엇보다 따뜻해야 한다. 애정과 진심이 담겨 있지 않는 충고나 조언처럼 공허하고 가식적인 것은 없다. 그러는 한편 카운슬러는 따뜻한 만큼이나 차가워야 한다.

상대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냉철하게 분석하여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고민에 공감하는 동시에 따끔한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아야 하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어야 한다.

한 마디로 ‘병 주고 약 주고’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의 목적은 자기과시나 상대를 놀림감으로 만드는 기만이어서는 안 된다. 이해관계를 떠나 상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가 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순수한 선의만이 카운슬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여기 그 모범사례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김형태는 화가로 뮤지션으로 무대미술가로 또 칼럼니스트로 독특하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아티스트다. (그는 스스로를 ‘무규칙이종예술가’라고 정의한다.)

그런 그가 몇 년 전부터 자신의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젊은이들의 고민을 상담하기 시작한 것이 세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스스로의 간절한 꿈을 이루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젊은 시절을 보냈던 김형태는 요즘의 청춘들을 더없이 불행한 세대라고 규정한다.

그들은 기성세대가 이룩해 놓은 안정과 풍요 위에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나약하게 자라나 할 줄 아는 것은 그저 입시시험의 객관식 문제를 푸는 것뿐인 로봇 같은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어른이 되었어도 특별히 갈망하는 것도 반드시 이루고 싶은 것도 없이 그저 막연한 안위를 바라는 패기 없는 속물들이 이 시대 청춘의 초상이며, 그들 대부분은 무기력한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으로 젊은 날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김형태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진심으로 분노한다.

“20대들은 정확히 하고 싶은 일이 없고, 확실하게 할 줄 아는 것이 없고, 겁은 많아서 실패는 무진장 두려워하고, 무엇이든 보상이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으면 절대 시작도 하지 않으며, 눈은 높아서 자기가 하는 일도 주변의 현실도 모두 못마땅하고, 시시껄렁하고, 옛날 사람들처럼 고생고생하면서 자수성가할 자신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고, 어떻게 하면 편하고 안정된 직장을 얻어 돈을 벌 수 있을까만 궁리합니다. 가장 혈기왕성해야 할 20대가 그런 식이니까 사회가 무기력해지고 경제가 침체되어 불경기가 오는 것입니다.”

그의 거침없는 일갈에 인신공격형 반박들이 쏟아졌지만, 김형태는 훌륭한 카운슬러의 역할을 꿋꿋이 해나갔다. 그의 따끔한 충고는 어떤 이해관계도 없이 오직 이 시대의 청춘들을 향한 김형태의 ‘애정 어린 관심’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돈이나 조건을 탓하며 실망하고 좌절하는 젊은이들을 냉정하게 꾸짖고 따뜻하게 위로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준다.

그리고 꿈을 가지라고 외친다. 그러자 ‘저 정신 좀 번쩍 들게 혼내주세요’라는 젊은이들의 상담이 줄을 잇는다.

<너, 외롭구나> 이 책은 그런 청춘들의 한숨과 눈물에 꼭 필요한 병을 주고, 꼭 필요한 약을 준다.


소설가 coolpond@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