켜켜이 쌓인 세월과 역사 그 흔적의 땅을 밟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엔 산줄기 사이로 수많은 고갯길이 뚫려있다. 우선 인제와 양양 사이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개로 꼽히는 한계령이 걸려 있고, 전통적인 유명세에선 조령으로 불리는 문경새재가 빠지지 않는다.

통행량으로는 국도ㆍ철도ㆍ고속도로가 나란히 지나는 황간과 김천 사이의 추풍령이 으뜸이요, 남한의 지붕으로 불리는 대관령은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동해 바다로 갈 때면 반드시 넘어야만 하는 고개다.

이렇듯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개는 모두 한반도의 근간을 이루는 백두대간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백두대간에서 가장 먼저 개척된 고개는 어디일까. 바로 충주 미륵리와 문경 관음리를 잇는 하늘재(525m)다.

서기 156년에 신라가 처음으로 개척

계립령(鷄立嶺)ㆍ마목현(麻木峴)ㆍ지릅재ㆍ한훤령(寒暄嶺) 등으로도 불렸던 하늘재를 처음 연 나라는 신라. 삼국사기에 ‘아달라 이사금 3년(156)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고 적고 있다.

죽령은 이보다 2년 뒤에 개척되었으니 기록상으로 볼 때 하늘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백두대간 고갯길인 셈이다.

낙동정맥 동쪽의 변방에 위치한 작은 나라였던 신라는 험준한 백두대간 등줄기에 하늘재를 개척함으로써 비로소 한강 이북으로 향하는 숨통을 열 수 있었고, 이를 삼국통일의 디딤돌로 삼았다.

하늘재는 삼국의 북진과 남진의 통로였기에 각국은 서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고구려 온달장군은 “계립령과 죽령 서쪽이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돌아가지 않겠다”는 출사표를 던지기도 했다.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상주를 칠 때도 이 고개를 넘었고, 망국의 한을 품고 길을 떠난 마의태자도 이 고갯마루에서 쉬어갔다. 그리고 1362년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공민왕의 피난행렬도 이곳을 넘어 봉화 청량산으로 갔다.

그러나 조선시대인 1414년(태종 14) 새재가 개척되면서 하늘재는 점점 잊혀진 고갯길이 되어갔다.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 나들목으로 나와 597번 지방도를 타고 수안보온천을 지나면 하늘재 서쪽 아랫마을인 미륵리다.

하늘재 고갯길에 있는 불두.

지금은 민박과 식당 몇 집만 자리잡고 있는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지만, 신라와 고려시대의 하늘재는 길손도 많고 제법 번성한 마을이었을 것이다.

매표소를 지나 5분쯤 걸으면 미륵리 절터가 나온다. 이곳은 석조와 목구조를 결합한 석굴사원으로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라고도 한다.

현재 석굴 상부의 목구조는 남아있지 않으나 하부 석굴 구조물 가운데는 주존불인 미륵대불(보물 제96호)이 서있다.

그 앞쪽엔 석등을 비롯하여 5층석탑(보물 제95호)ㆍ돌거북ㆍ당간지주ㆍ불상대좌 등 많은 석조물이 남아있어 창건당시의 사격을 말해주고 있다.

큰 바위를 다듬어 만든 돌거북은 머리 부분이 사실적이다. 등에 얹혀있던 비석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려 그냥 지나칠 수도 있건만, 절묘한 석공의 솜씨는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돌거북 왼쪽 어깨쯤에 주먹만한 아기 거북 두 마리가 뽈뽈뽈 기어오르는 모습을 새겨놓은 것이다. 관광객들은 누구나 아기 거북을 보고 한마디씩 거든다.

“저기 아기 거북들좀 봐!”

“아유, 녀석들 참 귀엽네!

미륵사지의 주불인 미륵대불은 특이하게도 북향을 하고 있다.

괜히 쓰다듬고 싶어지는 돌거북을 지나 5층석탑과 4각석등을 지나면 미륵대불이 미소를 짓는다. 고려 초기 새로 일어난 국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불상답게 대담하고 거대하다.

둥근 얼굴에 활모양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넓적한 코, 두꺼운 입술 등은 대불이 고려 초기에 지방화한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평이다.

이 절집은 몽골군 침입 때 대부분 불타버린 탓에 창건에 관해서는 많은 부분이 베일에 쌓여있는데, 가장 큰 비밀은 미륵대불의 시선이 북향이라는 점이다. 미륵대불의 시선을 좇아 북녘을 바라보면 월악산 영봉(1,094m)이 올려다 보인다.

미륵불이 북천을 바라보는 까닭은?

민초들은 여기서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 전설을 길어냈다. 마의태자와 누이 덕주공주 남매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하늘재를 넘다가 이 대불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불입상은 마의태자 상이요 월악산 덕주사 마애불은 덕주공주 상이라고 했다.

마애불은 남향이고 석불이 북향인 까닭은 두 남매가 마주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이곳이 신라 부흥운동의 진지였다고도 한다.

몇 차례 발굴조사에서 절이 고려 때 세워졌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이번엔 태조 왕건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왕건이 새로운 나라를 열기 위해 이곳 월악산 자락에서도 불사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하늘재를 지켜온 충주 미륵사지. 석조와 목구조를 결합한 석굴사원으로서 미륵대원지라고도 한다.

그리곤 북천을 향하는 대불의 시선은 대륙을 넘보고자 했던 고려 왕조의 넘치는 기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백두산과 옛 고구려 땅을 되찾겠다는 의지의 상징으로 여기에 세웠다는 것이다. 허나 그 피끓는 의지에 비하면 대불은 한없이 소탈하다.

북천을 향한 미륵대불의 비밀스런 눈빛을 뒤로하고, 새끼 거북과도 헤어지면 길은 하늘재 고갯마루로 이어진다. 낙엽으로 뒤덮인 길은 아이들과 손 붙잡고 휘파람 불며 산책 삼아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완만하고 널찍하다.

미륵리사지에서 고갯마루까지의 거리는 2㎞. 걸어서 30~40분 정도 걸리니 아이들과 함께 천천히 산책한다 해도 왕복 2시간도 안 걸린다. 아쉽게도 고갯마루에서 문경 쪽은 아스팔트 포장길이다.

월악산 국립공원 입장료는 어른 1,600원, 청소년 600원, 어린이 300원. 주차료는 1시간 1,000원, 10분당 200원 추가. 미륵리매표소 전화 043-846-2976

여행정보

교통 전국 어디서든 최근에 완전히 개통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게 가장 편리하다.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 나들목→597번 지방도→수안보온천→597번 지방도→미륵사지. 괴산 나들목에서 30분 소요. 동서울터미널에서 매일 9회(06:40~19:40) 운행하는 월악산행 시외버스를 타고 미륵리에서 하차. 1만800원.

숙식 미륵리로 접근하는 길목에 만나는 수안보온천 지구엔 수안보 관광호텔(043-846-2311) 등 10여 개의 호텔급 숙박업소와 궁전파크(043-845-3210), 온천장(043-846-3161), 등 수 많은 모텔급 숙박시설이 있다. 미륵사지 주차장 근처엔 미륵가든(043-848-6612), 뫼악산장(043-848-9478), 월악산민박(043-846-6193) 등이 있는데, 식당은 민박을 치기도 한다.




글·사진 민병준 여행작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