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발명, 부조리의 매혹

여기 담배 파이프를 그린 그림 한 점이 있다.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그림처럼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그저 담배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다.

누구나 그것이 파이프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파이프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써 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그럼으로 해서 그 그림은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반 고흐의 <해바라기>에 못지않을 정도로 유명한 그림이 되었다.

(누구나 그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전까지 누구도 그리지 못한)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름은 르네 마그리트(1898~1967)다.

다시 그림을 보자.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림 속에 그려진 것은 파이프다. 그러나 그 파이프 아래에는 그것이 파이프가 아니라고 씌어 있다.

그림 속의 파이프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한 물건이다. 분명 담배 파이프가 맞다. ‘그러나 과연 정말 그럴까’ (이 단순한 질문은 참으로 중요하기도 하다.

인간의 역사는 이 질문을 통해 진보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다.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려진 이미지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짜 파이프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림 속의 파이프로는 아무도 담배를 피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파이프이지만 파이프가 아닌 것이다.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인 마그리트의 그림은 흔히 ‘형이상학적 회화’로 불린다. 그러나 마그리트는 자신이 그와 같은 한 줄의 문장으로 간단명료하게 설명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을 사람이다.

그의 모습은 화가라기보다는 사색하는 철학자나 지적인 시인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마그리트의 이미지일 뿐 마그리트의 실체는 아닐지 모른다. 마그리트는 마그리트이면서 동시에 마그리트가 아니다. 예의 파이프와 마찬가지다.

마그리트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상, 언어, 이미지들을 전혀 예상치 못한 낯선 모습으로 탈바꿈 시켜 우리에게 보여준다.

여자의 아름다운 나체가 배경이 되고 있는 푸른 하늘빛으로 변해 가는 가하면, <연인>이란 제목의 그림에 나란히 등장하는 남과 여는 흰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흔히 상반신이 여자의 형상으로 하반신이 물고기로 묘사되는 인어는 그의 그림 속에서 상반신이 물고기로 하반신이 여자로 바뀌어 있다.

중산모를 쓰고 단정히 검은 양복을 차려 입은 남자의 얼굴 앞에 사과 한 개가 떠 있다. 그림의 제목은 <사람의 아들>이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당혹해 한다. 갸우뚱거리는 머리 위로 큼직한 물음표가 하나씩 떠오른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무엇을 그렸는지 그 형상을 가늠할 수 없는 일반적인 추상화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마그리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말 탄 기수, 숲 속의 나무, 하늘의 구름, 의자, 창문, 바이올린 등은 앞서 언급한 담배 파이프처럼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대상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익숙한 대상들로 채워진 그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도대체 이게 뭘 그린 거야’ 하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

수지 개블릭은 직접 마그리트 부부와 함께 생활하기도 하면서 그의 작품세계를 깊이 있게 연구한 미술학자다. 그의 저서 <르네 마그리트>는 단순한 예술가의 전기로 읽히지 않는다.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과 고뇌에 찬 예술가의 열정적인 삶을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화가의 전기라면, 이 책은 마그리트의 작품들이 보여주고 있는 심오한 세계가 20세기 전반이라는 시대(혹은 그 시대정신)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0세기는 과학은 물론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과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한 변화와 부침을 겪은 시기다. 역사상 20세기만큼 단기간에 인류 전체가 급격한 변화를 겪은 시기는 없었다.

그야말로 경이롭고 복잡하고 난해한 시대였다. 기존의 가치관은 전복되었고, 생활방식이 달라졌으며, 숱한 갈등과 모순이 충돌하였고, 그 과정에서 참혹한 전쟁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마그리트는 자신의 그림에 의구심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비’와 ‘상식’에 대해서다.

“우리가 세상과 또 세상의 여러 사물에 대하여 갖고 있는 평범한 지식은 회화에서 그 표현방식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사물의 꾸밈없는 신비는 현실에서 그러하듯이 그림에서도 주목 받지 못한 채 간과될 수도 있다.(……) 만약 감상자가 내 그림이 ‘상식’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분명한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게 있어서 세상은 상식에 대한 도전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자신의 그림보다 더 상식적이지 않다는 것, 마그리트의 그림 속에서 표현되는 기이하고 부조리한 모습들은 쉽게 말해 우리가 상식이라고 교육 받아온 익숙한 개념들에 대한 ‘배반’이다.

우리는 설명을 원한다. 의미를, 이해를 원한다. 두렵기 때문이다.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마그리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르네 마그리트 표지

“사람들은 편안해지기 위하여 의지할 만한 것을 원한다. 안전하게 매달릴 만한 것을 원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공허함에서 자신을 구할 수 있다. 상징적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본질적인 시적 요소와 이미지의 신비함을 간과하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신비함을 감지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떨쳐 버리고 싶어 할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물음으로써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신비함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다른 반응을 나타낼 것이다. 전혀 다른 것을 묻게 될 것이다.”

수지 개블릭은 마그리트의 그림이 ‘역설에 근거를 둔 변증법적인 과정’을 통해 ‘정의가 불가능한 우주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고정관념과 틀에 박힌 상식에 기인하고 있는 의미와 이해를 떨쳐버리면 우리는 불가해한 삶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꿈과 현실과 무의식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낯설게 변형시키고 정신과 관념을 새롭게 결합시킨다.

신비한 것은 그저 신비한 것이다. 우리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한 마디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그가 창조해낸 이미지들이 더없이 매혹적이란 사실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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