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찡한 인간과 야수의 사랑

1933년 원작 '킹콩'을 보지 못했더라도 ‘킹콩’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대한 고릴라 괴수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금발 미녀를 손에 쥐고 포효하는 저 유명한 장면은 광고를 비롯 다양한 영상물에서 등장했다.

이 장면에 담긴 암시는 금발 미녀를 손에 쥔 야수에게서 나오는, ‘미녀와 야수’ 신화의 반복으로 이미적으로는 섹스 어필한 측면이 다분했다.

1933년작 '킹콩'에서 매우 엉성한 내러티브를 채워넣는 스펙터클은 원시적인 쾌감을 관객들에게 일깨워줬다.

수 차례 리메이크 됐으나 매번 대성공을 거두었던 '킹콩' 시리즈에 매료된 사람은 많았지만, <킹콩>을 다시 부활시키려는 야심을 품은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반지의 제왕>으로 판타지 스펙터클 장르의 제왕이 된 피터 잭슨은 그러한 야심을 수십 년간 흉중에 품어 왔던 ‘킹콩 프로젝트’의 적임자였다.

콩을 만나기까지

14살 때 1933년 판 <킹콩>을 보고 영화감독이 될 결심을 했다는 피터 잭슨의 꿈이 실현되기 위해 그에게는 <반지의 제왕>이 필요했다.

오랜 시간 <킹콩>의 리메이크를 추진해왔던 잭슨은 상황이 여의치 않자 <반지의 제왕> 프로젝트에 먼저 착수했다. <반지의 제왕> 3부작의 엄청난 성공은 그에게 일생의 염원을 실현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단 몇 마디로 요약해버릴 수 있는 줄거리는 그리 대단치 않다. 망상적 영화감독 칼 던햄(잭 블랙)이 자신의 영화팀을 이끌고 촬영을 위해 해골 섬에 들어갔다가 마지막 남은 괴수 킹콩을 만난다.

킹콩의 상업적 가치를 직감한 던햄은 괴수를 생포해 뉴욕으로 데려오지만 문명 도시는 금발 여배우 앤 대로우(나오미 와츠)에게 연정을 품은 이 괴수에 의해 아수라로 변한다.

피터 잭슨은 1933년 판 <킹콩>을 어떻게 완벽히 재현할 것인가에 골몰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랍다. 거대한 세트와 놀라운 CG기술 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원작의 정서적 반향을 살려낼 수 있는가에 있었다.

킹콩이 다른 괴수영화와 달랐던 건 킹콩에 대한 연민이 솟아난다는 점이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킹콩이 추락할 때, 관객들은 킹콩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이다.

피터 잭슨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위해 원작의 인물 묘사에 변형을 가했다.

원작의 금발 미녀 앤 대로우가 그저 공포에 질려 소리만 질러댔던 인물이라면, 피터 잭슨의 <킹콩>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은 새로운 앤을 연기하는 나오미 와츠(<멀홀랜드 드라이브> <링> <21그램>)다. 잭슨이 나오미 와츠를 캐스팅한 의도는 매우 명백해보인다.

아름답지만 지적이고 용감한 앤은 더 이상 괴수의 손아귀에서 공포에 떠는 여성이 아니다. 그녀는 궁지에 몰리긴 했지만 항상 자신의 주관대로 행동하는 용감한 인물로 그려진다.

극 중에서 코미디 배우인 앤리 자신의 장기를 보여주어 콩의 관심을 끌며 교감을 나누는 장면은 콩이 앤에게 이끌리는 것이 단순히 동물적인 본능이라기보다는 정서적 교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설파한다.

이러한 앤과 콩의 교감은 <킹콩>의 비교적 느슨한 내러티브를 단단히 묶어내는 기둥 구실을 한다.

디지털 기술의 축복

<킹콩>의 장면 묘사는 디지털 기술을 통해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인 화면을 만들어내는 하이퍼 리얼리즘의 극치를 보여준다. 공룡과 식인 거미, 식인 거머리 등 각종 괴물의 생생함에 저절로 눈이 감겨질 정도다.

세 시간에 달하는 상영시간의 상당수가 총천연 괴수들의 활극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놀랍다. 끊임없이 쫓고 쫓기는 괴물과 사람의 혈투는 <킹콩>의 백미다.

특히 해골 섬 절벽에서 추락하며 킹콩과 공룡이 벌이는 수분 간의 사투는 영화 기술의 발전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여주는 경탄할만한 비주얼을 선사한다.

원작의 스펙터클을 업그레이드하면서, 피터 잭슨은 자신의 스타일과 <킹콩> 시리즈의 본질이 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한다.

잭슨의 이전 영화들에서 내러티브 보다 선행했던 것은 금방이라도 스크린에서 튀어나올 듯 촉각을 자극하는 이미지들이었다.

피가 튀고 살이 난무하는 시체들의 대소동 <데드 얼라이브>가 그랬고, 두 사춘기 소녀들이 빠져드는 공상 속의 애니메이션 세계를 정교하게 보여준 <천상의 피조물>이 그랬다.

피터 잭슨은 괴물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장기인 과대망상적 상상력을 극대화한다.

거대한 브론토사우루스 공룡과 작은 육식 공룡들이 한꺼번에 좁은 통로로 구르듯 밀려나오며 주인공 일행들을 쫓아오는 장면은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의 패러디처럼 보인다.

지극히 사실적인 공룡들의 습격을 그린 <쥬라기 공원>과는 달리 <킹콩>에서 마치 거대한 홍수처럼 밀려오는 공룡들은 제 발에 제가 채이고 서로 이리저리 뒤엉켜 넘어진다.

그 사이를 용케 도망다니는 인간의 모습은 긴박감 보다 웃음을 자아낸다. 잭슨이 <킹콩>에서 보여주는 온갖 엽기적이고 공포스러운 장면들에 유머가 묻어있는 것은 그가 <반지의 제왕>의 엄숙함에서 벗어나 자신의 B급 취향으로 귀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미지를 통해 격렬한 감정을 전달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잭슨은 여주인공 앤과 킹콩 간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애정을 묘사하며 끝내 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시고 만다.

모션 캡처 기술을 이용한 디지털 캐릭터인 킹콩에 이토록 감정이 이입되는 것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골룸과 마찬가지로 킹콩이 감정과 판단 능력을 지닌 인간적인 괴물이기 때문이다.

<킹콩>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들처럼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인간의 감정을 불어넣음으로써 빈약한 내러티브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감정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탁월한 대중 영화로 재탄생했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