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 여류비행사의 열정적 삶과 사랑

개봉 전부터 친일논란에 휘말린 <청연>은 ‘허구화 된 실재 이야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를 던진다. 영화가 묘사하고 있는 박경원의 친일행적이 알려지면서부터다.

명백히 픽션을 구성하는 감독의 시선이 역사를 바라보는 한 개인의 시선으로 성급하게 치환될 가능성이 이런 논란을 부추기고 있다.

영화를 보면 ‘친일’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이처럼 실존인물이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늘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영화 외적으로 수난을 겪고 있는 것과 상관 없이, <청연>은 단순한 실화 소재의 블록버스터 이상의 흥미를 자아낸다.

조선 최초의 민간 여류 비행사인 박경원의 열정적인 인생유전을 다룬 <청연>은 데뷔작 <소름>으로 평단의 만장일치의 지지를 얻었던 윤종찬 감독의 탄탄한 연출력과 <소름>에서 말 그대로 소름끼치는 연기를 보여줬던 여배우 장진영의 진가를 재확인할 수 있는 수작이다. .

설움을 하늘에 날리다

어린 시절 우연히 목격한 비행기를 동경하며 하늘을 날겠다는 꿈에 사로잡힌 박경원(장진영)은 갖은 고생 끝에 홀홀단신 현해탄을 건넌다.

비행사의 꿈을 좇아 일본 최정예 엘리트만이 입학할 수 있다는 다치가와 비행학교에 입학한 그녀는 학비를 위해 밤마다 택시를 몰다 조선인 유학생 한지혁(김주혁)을 만난다.

비행학교에서 최고 실력을 쌓으며 승승장구하던 경원은 우여곡절 끝에 전국 비행학교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을 거머쥐고 일약 스타로 등극한다.

그러나 조선인이라는 그녀의 정체성으로 인해 오로지 하늘을 향한 그녀의 맹목적인 삶에 서서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거부였던 지혁의 아버지가 총격에 비명횡사한 후 급전직하한 연인과의 사랑, 비행을 대가로 굴종을 강요하는 일본의 요구 등 경원의 지상의 삶은 고단하기만 하다.

<청연>은 드라마틱한 실존 인물의 삶을 조명하는 대작 영화가 갖추어야 할 기본기를 충실히 갖춘 영화다. 제작 기간만 3년, 순제작비 95억원을 투입한 초대작이지만 제작기간 내내 흉흉한 소문이 감돌았던 불운한 작품이기도 했다.

‘항공 촬영’이라는 만만치 않은 기술적 시도와 미국, 중국, 한국을 오가는 다국적 로케이션, 1920-30년대에 존재했던 복엽기를 발굴해내고 이를 토대로 박경원의 비행기 ‘청연’의 모습을 복원하는 등 프로덕션 과정도 녹록치 않았다.

복엽기 특유의 귀청 떨어지는 사운드를 미국까지 날아가 직접 채취하고, 공중 촬영을 위해 배우를 직접 비행기에 태우고 비행 장면을 찍는 등, 모험적인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다.

매끈한 편집과 촬영, 적절히 고양되는 인물의 감정, 비행 장면을 장식하는 화려하고 박진감 넘치는 이미지들은 실속 있는 대중영화의 모범이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는 고통이나 죽음에 얽힌 어두운 기억, 누구에게도 이해 받을 수 없이 자신의 내면으로만 침잠하는 인물에 대한 윤종찬 감독의 관심이 담겨 있다.

윤종찬 감독은 칼로 베어낸 듯 박경원의 삶을 양지와 음지로 나누어 극명하게 대조 시킨다. 박경원이 다치가와 비행학교에서 주최한 비행대회에서 우승하는 그 순간까지 영화는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를 보는 것처럼 진행된다.

동료들과의 끈끈한 우정, 연인과의 달콤한 사랑, 경쟁자마저도 감화시킬 수 있는 박경원의 중한 비행 실력은 이후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현실적 고통을 더욱 처절하게 만드는 달콤한 백일몽처럼 보인다.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는 듯한 이런 몽환적인 이미지들이 이후 전개되는 경원의 끔찍한 수난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슬픔과 눈물의 비상

그 천국에서 지옥으로 하강하는 분기점에 동료 비행사의 죽음이 있다. 극 중에서 사고로 죽은 동료 대신 비행 대회에 출전한 박경원은 난생 처음 비행 도중 슬픔을 느낀다.

산소마저 희박한 4,500m 상공으로 솟구치는 순간 클로즈업된 박경원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은 그녀에게 있어 비행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중요하면서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 순간 경쟁자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공중 랠리, 놀이기구에 처음 오르는 아이처럼 설레는 비행의 꿈은, 죽음을 향해 가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경원이 덧없이 꾸는 달콤한 추억의 자리로 물러선다.

연인 한지혁이 일제에 항거하는 테러리스트의 누명을 쓰면서 여류 비행사의 날개는 꺾이고 만다.

공모자로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잃어버린 채 자신의 꿈인 장거리 비행을 위해 제국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는 박경원의 가혹한 운명은 마지막 순간으로 치달아 간다.

후반부 점점 출구 없는 구석으로 내몰리던 경원은 마침내 첫 장거리 비행에서 자살에 가까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윤종찬 감독은 영화 후반부 지혁과 경원이 겪는 잔인한 고문 장면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며, 주인공과 그녀에게 이입된 관객들의 감정을 급격히 이완시킨다.

영화 후반부 경원의 여동생이나 다름없는 이정희가 펼쳐 드는 경원의 일기장이 보여지는 장면은 초반부 그토록 아름답기만 했던 이미지들에 대한 무언의 답이다.

그 이미지들은 마지막 비행에서 죽음을 앞둔 순간에 그녀의 머리 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아름다운 시절에 대한 회상에 가깝다. 뒤이어 찾아올 어둠을 맞이하기 위한 밝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박경원을 연기한 장진영의 복잡미묘한 표정은 이 영화의 백미다.

주인공의 대사처럼, <?연>은 일제 치하에서 치열한 삶을 산 한 조선인 여성의 삶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결국 조선인, 일본인, 남자, 여자의 구분이 무의미한 절대적인 고독, 혹은 죽음을 향한 한 인간의 맹목적인 꿈으로 모든 것이 수렴되는 기이한 영화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