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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타운] 이준익 감독 '왕의 남자'




'태풍' '청연' 등 100억대를 호가하는 경쟁작들에 비해 저예산(약 44억원 가량의 제작비가 들었다)으로 만든 '왕의 남자'가 신년벽두 극장가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우연히 아니다.

가장 낮은 신분의 천민들이 최고 권력자들을 상대로 도발적 놀이를 벌이는 이 흥미진진한 영화는 근래에 보기 드문 완벽한 만듦새를 보여준다.

사극으로서의 볼거리와 당대 사회를 향해 던지는 의미심장한 메시지, 배우들의 혼신의 연기, 감독의 안정된 연출력 등 영화적 완성도에서 흠잡을 구석이 거의 없다.

스펙터클에 대한 욕심이 지나쳐 드라마에 소홀하지도 않고 시대극 재현을 위해 배우들의 연기를 희생시키지도 않는다.

드라마와 주제, 연기, 미술, 촬영 등 영화 표현의 모든 요소들을 이만큼 균형감 있게 조합한 영화도 드물다.

권력을 조롱하는 광대들

'황산벌'에 이은 이준익 감독의 두 번째 시대극인 <왕의 남자>는 전작에 비해 제법 진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남사당패 광대 장생(감우성 분)은 권력을 쥔 세도가들에게 농락을 당하던 속박된 삶을 거부하고 친구 공길(이준기)과 야반도주한다.

야전에서 갈고 닦은 자신들의 실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놀이판을 찾아 한양으로 올라온 두 사람은 뛰어난 재주와 신명으로 저잣거리를 평정한다.

그러던 어느날 장생과 공길은 왕 연산(정진영)과 그의 애첩인 녹수(강성연)의 관계를 풍자하는 놀이판을 벌이다 궁중 관리의 눈에 띄어 의금부로 끌려간다.

왕권을 능멸한 죄로 참수를 당할 처지에 놓인 장생 일행은 왕을 웃기면 면죄부를 주겠다는 조건으로 연산 앞에서 광대극을 벌이고 이를 계기로 궁중 광대가 된다.

'왕의 남자'에는 감독의 솜씨를 뽐내는 장면이 거의 없다. 흥겹고 화려한 볼거리들은 많지만 여느 영화처럼 말초적 쾌락을 위한 스펙터클을 꾸며내지 않는다.



권력을 가지고 놀다가 그 노리개로 전락하는 광대들의 운명은 관객들을 웃겼다 울렸다 한다. 외줄타기와 사설이 긴 창, 사물놀이 등을 몸에 익힌 배우들의 열연은 직접 눈으로 확인할 때 진가가 드러난다.

그 중에서도 '발레교습소'에 잠깐 출연한 게 전부인 신인 이준기의 끼와 모성에 대한 그리움으로 비뚤어진 왕 연산을 연기하는 정진영의 광기는 기대와 상상을 모두 뛰어넘는다.

천상 광대가 된 듯 스크린 위를 활개치는 배우들과 더불어 궁중 사극의 비주얼을 완벽히 재현하고 있는 공들인 미술도 영화에 윤기를 더한다.

‘고증’이나 ‘재현’에만 매몰되지 않는 미술은 영화의 주제와 완벽하게 섞인다.

절찬리 공연되고 있는 연극 '爾(이)'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권력의 속성을 맛보고 그 속으로 침잠해가는 주인공 공길에 초점을 맞춘 연극과 달리, 자유로운 광대의 혼을 가진 장생 일행과 권력의 관계를 다룬다.

천출 신분을 벗어나 권력의 핵심으로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공길의 타고난 끼는 ‘독이 든 성배’와 같다. 이준익 감독은 권력의 바깥에서 권력을 희롱하다 그 속성에 젖어 들고 마는 인간의 속성, 남성화된 권력자들의 관계를 희롱하는 여성성의 전복적 의미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

놀이 미학의 진수

'왕의 남자'는 역사를 도용하거나 재구성하는 ‘소재주의’의 차원에 머무르는 시대극이 아니다.



당대성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사극이지만 이 영화는 추락한 지도자의 이미지, 부하뇌동하는 정치 모리배들의 작태, 타락한 권력을 희화화함으로써 그저 볼거리를 위한 사극에 머물지 않는다.

매관매직(賣官賣職)을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고 권력을 좇아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조정 대신들의 모습은 퍽 시사적인 울림을 준다.

우리 시대의 긴요한 문제들을 겨냥한 이러한 설정들은 과거를 재현하거나 재구성한 영화들을 회고적으로 감상하는 ‘거리두기' 보다 당대에 그것을 투사시켜 보기를 종용한다.

'왕의 남자'는 무엇보다 유희의 미학을 몸소 증명해 보인다. 궁궐에서 놀이판을 놀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장생은 “왕을 가지고 노는 거야!

개나 소나 입만 열면 왕 얘긴데, 좀 노는 게 뭐가 대수야?”라고 말한다. 여기엔 왕권을 희롱하고 권력을 능멸하는 유희 미학의 진수가 담겨있다.

웃고 떠드는 놀이판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누구나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법. 장생 패들이 행하는 놀이는 세상을 바꾸는 혁명은 아니지만 위정자들의 행태를 풍자함으로써 에둘러 변화를 이끌어낸다.

'왕의 남자'는 이 같은 놀이의 혁신적 함의를 제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놀이가 개인의 복수나 욕망을 위해 쓰여졌을 때 본래 의미는 변색되고 만다.

어머니에 대한 개인적 복수심과 공길에 대한 비정상적 애정으로 치닫는 연산의 광기가 이 신명의 놀이판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후반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왕의 남자'는 보수와 진보가 뒤섞이고 권위와 권력이 혼동되는 시대에 먹이는 통쾌한 한 방이다.

근자의 한국영화들 중 가장 인상적인 클로징으로 기억될 마지막 장면은 지상에서 발을 떼고 아슬아슬한 외줄 하나에 몸을 의지한 광대일망정 시대를 희롱하며 흥겹게 놀이판을 벌일 수 있는 유토피아적 세계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놀이판의 감칠맛과 쌉싸름한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이 영화는 한낱 저잣거리의 광대놀음을 시대변화의 요인으로 승화시킨다.

물론, 이것은 가상으로 재구성된 허구의 역사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전혀 허무맹랑한 작위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건 '왕의 남자'가 성취한 진정한 독창성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


입력시간 : 2006-01-1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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