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술·여자와 함께 세상을 풍미한 자유인

김삿갓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하는 유행가가 나온 지도 이미 50년이 넘었다.

이처럼 김삿갓이 숱한 전설과 일화를 남기며 방랑하던 풍류시인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직도 그의 본명을 모르는 사람이 많고, 더군다나 그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 무슨 까닭으로 한평생 방랑을 했으며, 언제 어디에서 세상을 떠나 어디에 묻혔는지 모르는 사람은 더욱 많다.

삿갓으로 하늘을 가리고 죽장 짚고 미투리 신고 한평생을 떠돌아다닌 천재시인 김삿갓, 풍자와 해학과 기지로 어우러진 파격적 시풍(詩風), 보통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기행으로 가는 곳마다 전설을 남기고 사라진 방랑시인 김삿갓, 그는 바람처럼 구름처럼 물결처럼 이 땅의 산수와 저자 간을 마음대로 넘나든 영원한 자유인이요 풍류가객이었다.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순조 7년(1807)에 김안근(金安根)과 함평 이씨(咸平李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양주군 회천읍 회암리.

김삿갓은 어찌하여 방랑길에 나섰을까. 최근까지는 김삿갓이 21세 되던 해에 영월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할아비 김익순을 욕한 시를 지어 장원한 것이 가출․방랑의 계기라는 설이 정설처럼 굳어져왔었다.

김익순은 홍경래란 때 반란군에게 항복한 선천부사였다.

하지만 이는 사리에 맞지 않는다. 비상한 천재 김병연이 나이 스물이 되도록 치욕스러운 집안의 내력을 전혀 몰랐을 리가 없다.

할아비가 역적으로 처형당하고 집안이 망할 때 그의 나이 다섯 살이었으니 어렴풋이나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했을 것이고, 그 뒤 이리저리 떠돌며 숨어살던 일이며, 아버지가 울화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은 이유도 알고 남았을 것이다.

김삿갓의 가출과 방랑은 빼어난 재주를 타고났건만 출신성분 때문에 구만리장천과도 같은 앞길이 막혀버린 좌절감과 울분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초탈한 인생사, 한국의 詩仙으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떠도는 인생, 세상잡사 초탈하여 풍류 한마당으로 천지간을 배회하니 신선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김삿갓을 가리켜 뒷날 사람들이 한국의 시선(詩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선도 지상에 머무는 동안은 먹어야만 했으므로 때로는 마을에서 문전걸식도 했고 때로는 절에서 공양 신세를 지기도 했다.

어쩌다 운율깨나 아는 주인을 만나면 제법 그럴듯한 환대도 받았을 것이고, 또 기막히게 운수대통한 날이면 풍류를 알아주는 어여쁜 기생으로부터 아래위로(?) 극진한 사랑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어느 날 어느 서당에 들러 잠시 쉬자니 버르장머리 없는 학동 녀석들이 거지나 다름없이 초라한 행색의 김삿갓을 깔보고 놀려댔다.

김삿갓이 칠판 아닌 벽판에 시 한 수를 써 붙인 뒤 이렇게 일러주고 떠났다. “이 시는 글자 뜻으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나는 대로 새기느니라.”

- 書堂乃早至 先生來不謁 房中皆尊物 學生諸未十 -

또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유식한 척하는 부부가 식사 때가 되어도 식사 대접할 마음이 없어 딴에는 암호 같은 파자(破字)로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마누라 ; 인량차팔(人良且八 ; 食具= 밥상 차릴까요?)

서방 ; 월월산산(月月山山 ; 朋出= 이 친구 가거든.)

파자시의 대가인 김삿갓 앞에서 이럴 수가! 그야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 쓰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은 격이었다.

김삿갓이 자기도 이렇게 파자로 암호같은 한마디를 툭 던지고 떠나버렸다. “이 견자화중(犭者禾重)아 정구죽천(丁口竹天)이구나(猪種可笑= 이 돼지새끼들아, 가소롭구나!)”

풍류호걸 김삿갓 가는 길에 시와 술과 여자도 있었으리니 은근하고 감칠맛 나는 사랑의 시편도 어찌 없었으랴. 다음은 ‘회양을 지나며(淮陽過次)’라는 시.

- 산골 처녀 다 커서 어른 같은데

분홍빛 짧은 치마 헐렁하게 입었네

맨살 허벅지 다 드러나니 길손이 부끄러워

솔 울타리 깊은 집엔 꽃향기도 물씬하리. -

또 ‘기생에게 주다(贈妓)’라는 시에서는 이렇게 읊었다.

- 꽃 냄새 파고드는 사내 한밤중에 찾아가니

온갖 꽃 짙게 피어도 모두 무정터라

홍련을 꺾고 남포(南浦)로 가니

동정호 가을 물결에 작은 배만 놀라네. -

이들 시에서 ‘솔 울타리 깊은 집’이니 ‘남포’니 ‘동정호’니 하는 것은 모두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김삿갓이 함흥을 거쳐 단천에 갔을 때에 어떤 처녀와 눈이 맞아 3년간 훈장 노릇을 하며 살았다는 설도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삿갓은 자신이 처자식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부남이라는 점을 밝혔을까 아니면 숨겼을까.

오며가며 짧은 밤을 불태운 떠돌이 사랑이야 풍류가객 김삿갓으로서 한두 번이 아니었겠지만 몇 해씩 한 자리에 주저앉아 신장개업(?)을 했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추측이다.

또 하룻밤을 지내고 보니 숫처녀가 아니어서 “털이 깊고 속이 활짝 열렸으니 필시 누가 지나갔으렸다?(毛深內濶 必過他人)”하자 처녀가 이를 맞받아, “뒤뜰의 익은 밤은 벌이 없어도 갈라지고 개울가 버들은 비가 안 와도 잘 자란답니다(後園黃栗不蜂折 溪邊楊柳不雨長)”했다는 우스갯소리도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시문을 아는 기생들과 사귀며 시와 사랑을 주고받은 흔적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또 다른 ‘기생에게 주다(贈妓)’라는 시도 그렇다.

-잡는 손도 뿌리치고 어울리기 어렵더니

되돌아와 한자리에서 친해졌구려

이 주선(酒仙) 저자에서 숨은 여인과 사귀니

이 여인 글 잘하는 문인이구려

우리 서로 옷고름 풀기까지 가까웠을 때

그대 모습 달빛에 술잔에 새로이 어리네

이제 서로 껴안고 동녘 성곽 달빛 아래서

술 취해 쓰러지듯 봄날 기듯이 정을 통하네. -

일세의 풍류시인 김삿갓은 철종 14년(1863)에 전라도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에서 57세로 세상을 떴다.

조선왕조 말 어지러운 시대의 그늘에서 좌절과 실의를 딛고 죽을 때까지 외로운 발길을 멈추지 않았던 김삿갓의 방랑 또한 그 나름대로 깨달음에 이르러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구도행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황원갑 소설가·한국풍류사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