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우 감독 '음란서생' - 사대극 고정관념 깬 퓨전 사극… "소심한 서생, 야한소설 쓰다"

사대부 서생, 음란한 상상에 빠지다.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퓨전 사극은 이제 한국영화의 유행 트렌드로 확실히 자리잡은 것 같다.

<왕의 남자>의 1천만명 흥행 신화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스캔들-조선남여상열지사>(이하 <스캔들>) <혈의 누> <천군> <형사 Duelist> 등 시대극의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영화들이 연이어 이미 관객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 최고로 음란한 놈들이 온다'는 카피를 내세운 <음란서생>은 퓨전 사극 열풍의 시발점이 된 <스캔들>을 쓴 시나리오 작가 김대우의 감독 데뷔작이다.

<정사> <반칙왕> 등 굵직한 흥행작들의 산파 역할을 해 온 그가 자신의 데뷔작으로 삼은 영화는 사대부 출신으로 음란 소설 창작에 빠지게 되는 소심한 서생을 주인공을 삼은 세태 풍속 코미디물이다.

난삽하고 음란한 작가 되기 고매한 사대부 가문의 명문장가 김윤서(한석규)는 권력이나 세도와는 거리가 먼 점잖은 선비다. 당파 싸움에 희생양이 된 동생의 사건을 맡게 된 윤서는 우연히 저잣거리 유기전에서 음란서가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음란하고 난삽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 책을 많은 이들이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윤서는 자신의 글재주로 음란한 상상을 현실화시킨다. 음란서 유통상 황가(오달수), 의금부 도사로 그림에 능한 광헌(이범수) 등과 합작해 당대 최고의 음란서를 제작하는 것이다.

<음란서생>은 작가 김대우의 출세작인 <반칙왕>과 <정사>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많다. 소심하고 억압된 또는 정숙한 존재가 우연히 접한 일탈의 계기를 통해 숨겨진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게 된다는 설정이 그러하다.

<반칙왕>의 대호가 가면을 쓰고 반칙을 일삼는 레슬러가 되면서 숨겨진 욕망과 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듯, <음란서생>의 윤서는 음란서를 통해 고리타분한 사대부 양반의 삶 속에 갇힌 처지에서 해방감을 맛본다.

대호가 사용하는 반칙의 종류와 강도가 날로 도를 더해가듯, 윤서의 음란한 상상도 끝없이 확장된다.

반칙과 음란서가 난잡하고 일탈적인 행위라는 것도 마찬가지. 엄격한 사회 질서와 규범이 금지하는 '음란함'이 과연 난삽하고 금지해야만 할 것인가. 영화는 쾌락을 추구하는 일체의 언행을 죄악시하는 사회분위기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음란서를 제작하고 유통하는 황가가 말하듯, '꿈에서나 본 듯한 것', '꿈에서라도 해보고 싶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들이 음란서를 만드는 목적이다. 금지된 것, 천하고 역겨운 것, 불손하고 남세스러운 것 속에서 김대우 감독은 답답한 현실의 벽을 부수는 불온한 상상의 힘을 찾아낸다.

행동하는 것을 누구보다 두려워했던 윤서는 기꺼이 이 상상의 힘에 몸을 맡기고 변하기 시작한다. 도색소설 작가가 된 후 그의 과감한 행동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현실보다 더욱 달콤하고, 매혹적인 픽션을 보여주겠다는 창작자의 은밀한 흥분이다.

속되고 천한 것으로 치부되는 음란성은 이 영화에서 ‘생의 증거’다.

살아있음의 증거는 머리가 시키는 일만 하는 고상한 사대부의 삶이 아니라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할 때의 감촉할 수 있는 음란작가의 삶에서 나온다. 그런 이유로 <음란서생>이 다루는 주제는 사극이라는 장르에 국한해서 볼 만한 성질은 아니다.

퓨전 사극의 최신 버전 <음란서생>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퓨전 사극 중에서도 가장 멀리까지 나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세태에 빗대자면 포르노 소설이나 사진, 야동(야한 동영상)에 해당하는 음란서의 유통과정을 묘사하는 것이나 '댓글'이나 '동영상’ ‘폐인’ 따위의 인터넷 용어를 사용하는 것까지 영화는 사극의 관습이랄 수 있는 시대성을 깡그리 무시한다.

시대와 공간을 넘나드는 분방한 혼성 미학이라 할 수 있는 퓨전의 의미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장치들 때문에 영화는 비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조선 중기라는 시대적 배경 또한 엄격한 사회 분위기와 사대부 서생의 억압적인 처지를 위해 차용된 것일 뿐, 당대의 시대정신과 어떤 식으로든 만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 시대에 음란한 상상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과거'로 돌아가 보여주려는 것이다.

<음란서생>을 볼 만한 영화로 만드는 요소는 무엇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음란작가 김윤서의 삶에 ‘작가’로서 자신의 세계관을 대입한 김대우 감독은 곁눈질을 허용하지 않는 조밀한 드라마의 힘으로 마음을 홀린다.

법도와 도리를 저버린 사대부 음란작가 김윤서, 난잡한 삽화를 그려 넣는 음란화가 이광헌, 음란서 제작업자 황가, 황가 수하에서 김윤서와 이광헌이 만든 원본을 베끼는 필사 장이와 모사 장이 등 주요 다섯 인물이 벌이는 상황은 시대를 조선으로 옮겨 놓은 것일 뿐 요즘 보는 코미디 영화의 코드와 다르지 않다.

윤서와 정빈(김민정)과의 로맨스를 묘사하는 방식은 <정사>나 <스캔들>의 품격에, 다분히 판타지적인 요소를 가미하고 있다. 웃음의 코드 역시 자못 현대적이다. 이들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대사와 입담은 시대극의 기준이 허물어지는 묘한 쾌감을 전해준다.

촬영, 조명, 미술, 의상, 소품 등 기술적인 완성도의 측면에서 흠잡을 것 하나 없지만 그저 예쁜 그림만으로 마음을 홀리는 기획 상품의 느낌을 주지 않는 이 영화를 빛나게 하는 것은 또한 주연, 조연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다.

두 얼굴의 음란 작가를 능청맞게 연기해 낸 한석규는 물론, 이범수, 오달수, 김민정, 김뢰하 등이 절묘한 캐릭터의 하모니를 보여주고 있다.

사극의 경계에 갇히지 않는 독특한 캐릭터와 음란한 상상력, 이에 더해진 배우들의 연기는 <스캔들>과 <왕의 남자>가 만들어놓은 웰메이드 시대극의 성취를 계승하게 해줄 <음란서생>의 힘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