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화는 대상과의 정신적 소통 수반돼야"

‘구상이면서 추상이고, 추상이면서 구상이다.’

이광춘(48) 경기대 미대 교수의 손끝에서는 예의 동양화법과는 완연히 다른 수묵화가 만들어진다. 수묵화 중에서도 그는 특히 인물화에 천착한다.

부시 미국 대통령, 사마란치 IOC위원장 등 외국 유명 인사에서 운보 김기창 화백, 영화배우 장미희,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등에 이르기까지 그림의 대상이 된 인물들의 면면도 흥미롭다. “전통의 재료로 현대적인 인물을 그리니까 동서양, 신·구(新舊)가 교차할 수밖에요.

첨단 기술은 알아도 ‘첨단 예술’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듯, 이러한 문화적 융합이 다소 생경해보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대중들이 점차 공감할 수 있게 됐을 때 화가는 가장 기쁘고 보람을 느껴요.”

누구나 그릴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공감을 끌어내기는 어려운 수묵 인물화에 관해 자신의 소신을 풀어낸다.

중국 흑룡강성 출신의 동포3세

이번 주부터 주간한국에 게재되는 것을 계기로 새롭게 선보이는 ‘2006년 인물들’의 수묵 초상화는 담백한 수묵화의 색채 감각과 현대적 인물의 개성을 예리하게 표착해내는 작가의 천재성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예를 들어 이번 호 주간한국 표지 인물화인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눈빛에선 멀리까지(2007년 대선?) 응시하는 강한 외향성이 느껴진다. 인물의 얼굴이 아닌, 내면세계까지 담고 있다.

이 교수의 설명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인물의 형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표현하는데 무게를 둔다”고 말한다. 같은 인물을 그리더라도 제각각 그 속에서 우러나오는 인물에 대한 느낌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정신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이 교수는 거듭 강조한다. 의상(意象)을 형상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교수의 수묵 인물화는 신묘하다. 동양화 특유의 신비로움을 발현하지만 그것은 서구적 현대미를 동시에 구현하고 있기도 한 까닭이다. 사실과 환영 사이의 독특한 접경 지대에 뿌리를 뻗는다.

익히 화단에 알려졌듯, 그는 재중동포 3세인 교포화가다.

중국 흑룡강성 목단 강시 출생. 노신(魯迅)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후 1982년 졸업과 함께 나라에서 월급 주고 집 주고, 창작 지원금까지 주며 창작 활동에 전념케 하는 명예의 ‘흑룡강성 화원’ 회원으로 발탁됐고, 84년에는 26세의 나이로 한국인으로서 전무후무하게 중국전국미술대전(우리나라의 예전 국전에 해당함)에서 동상을 수상하며 일류 화가로 발돋움했다.

그 당시 중국에서 수학하며 쌓은 실력이 그의 수묵 인물화의 탄탄한 근간을 이룬다.

“당시 중국 예술은 정치에 봉사하는 양태였어요. 예로부터 궁중에서 왕을 위해 인물화를 그렸던 것처럼, 인물화는 화가로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작업이었고 이를 잘 해야 인정 받을 수 있었죠.” 그는 인물화에 애착을 갖는 이유에 대해서도 “내 삶의 ‘18번’과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전통의 중국 대륙적 색채에 국한돼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너무 편향된 감이 있다. 87년 일본에 유학을 간 후 도쿄에서 2차례 개인전을 가졌고, 89년 백상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무려 8차례나 한국에서 전시회를 연 바 있는 그는 한ㆍ중ㆍ일 고유의 기법과 변화, 색채감각 등을 자기 것으로 수용해 발현해낸다.

“일본 작품들은 한 눈에 일본 작가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챌 만큼 국가색이 뚜렷한 반면 한국의 작품들은 저마다의 개성과 유행을 읽은 감각이 뛰어나다. 중국은 미술적 기초가 탄탄하지만 오랫동안 억눌린 문화 탓으로 침체된 면이 있다.”

이 교수는 3국에서의 활동경험을 토대로 한국 동양화의 매력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운보도 "필치 힘차다" 칭찬

故 운보 김기창 화백은 생전에 그를 두고 “현대적 감각이 뛰어나다. 세련되고 힘찬 필치가 참신한 구상과 어우러져 동양화를 색다른 면모를 보여준다”고 칭찬한 바 있다.

형식과 기법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문화의 충돌과 융합을 끊임없이 표현하고 연구해내는 그는 최근엔 얼굴에서 확장된 ‘인체’ 그림들로 독특한 새로운 작품 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이 교수가 그리는 인체, 즉 누드는 외설적이라거나 기존의 아름다운 여성미를 표현한 그림들과는 사뭇 동떨어져 있다. “아름다운 누드가 아니라 찢겨지고 파손된 몸을 통해 미학적 충격을 극대화한다.”

비극적 아름다움이 주는 여운이 훨씬 더 강하다고 그는 말한다. 이처럼 조각조각 찢겨져 있고 와해된 인체를 통해 그는 분열되고 와해된 현대 문명의 비극을 표출해내고자 한다.

“구상이면서 추상이자, 그 두 영역을 끊임없이 넘나드는 그림”이라는 박영택 미술평론가의 평처럼, 이 교수의 그림은 유에서 무의 경계로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이번에 주간한국에 실리는 그의 수묵 인물화는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독자들에게 동양화 감상의 즐거움도 선사할 것이다. 1년 동안의 그림을 한데 모으면 그 자체가 현대사의 기록도 된다.

이광춘 프로필

1982년 노신미술대학교 졸업

82~87 흑룡강화원 교수

87~88 일본신전외원 유학

88~94 한국일보사 초청 방한

91~92 덕성여자대학교 교수

99~現 경기대학교 교수

수상

1984 중국 제6회 전국미술전람회 동메달

1985 흑룡강 문예창작콩쿨 3등상 등 다수 입상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