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의 향기 ⑤ 넓은 도량 · 따뜻한 인품의 조선시대 최고 재상

황희(黃喜) 정승은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첫손 꼽히는 명재상이요 청백리였다.

그는 사소한 일에는 구애받지 않았고, 웬만한 남의 흉허물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던 대범하고 도량 넓은 인격자였으며, 그에 앞서서 평생 멋과 여유를 즐길 줄 알았던 풍류명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처음부터 매사에 모범적인 훌륭한 인물은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 들어감에 따라 지혜가 늘고 인품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황희에게도 어린 시절, 젊은 시절이 있었으니 처음부터 그의 인격이 한없이 고매하고, 풍류를 즐길 줄 안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젊은 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그가 선비 때의 일이니 시절은 고려 말이었다. 하루는 시골길을 걸어가다 보니 한참 떨어진 곳에서 소 두 마리를 부리며 밭을 가는 농부가 있었다. 황희가 가까이 다가가 이렇게 물었다.

“여보시오. 그 두 마리 소 말이오. 어느 놈이 더 일을 잘 하오?”

어느 소가 일을 더 잘 하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지나가다가 심심풀이삼아 그저 물어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농부가 일손을 멈추고 황희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귀에 대고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일러주는 것이었다.

“저기 저 누렁이는 일도 잘 하고 말도 잘 듣지만, 저쪽 검둥이는 일도 잘 안 하고 꾀만

부리면서 말도 잘 안 듣는다우.”

황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에이, 여보슈! 그런 걸 가르쳐주는데 굳이 여기가지 와서 귀엣말을 할 건 뭐요? 거기서 얘기해도 다 들릴텐데.”

그러자 나이든 농부가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어허, 모르시는 말씀! 그건 선비님이 아직 젊어서 모르고 하는 소리외다. 아무리 말 못하는 가축이라도 제 흉을 보는데 좋아할 리가 있겠수?”

그 순간 황희는 깨달았다. 아하, 그렇구나! 내 공부와 수양이 이처럼 밭가는 농부보다도 못하니 아직도 멀었구나. 짐승조차도 제 흉을 보면 싫어하거늘 사람이야 오죽하랴. 내 앞으로 각별히 언행언동에 조심하리라. 그렇게 생각한 황희는 더욱 과묵하고 침착하며 매사에 신중하게 처신했다.

사람을 중히 여긴 만백성의 어버이

황희가 뒷날 정승이 된 뒤의 일이다. 하루는 계집종 둘이 한참을 시끄럽게 다투더니 한 아이가 황 정승에게 쪼르르 달려와 재잘조잘 상대방의 잘못을 일러바쳤다. 이야기를 들은 황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냐오냐. 네 말이 옳구나. 저 애가 잘못이구나.”

그러자 다른 아이도 분을 이기지 못해 황 정승에게 달려가 조잘재잘 상대방의 잘못을 고해바쳤다. 그 아이의 말을 들은 황희가 또한 이렇게 말했다.

“오냐오냐. 네 말이 맞다. 저 애가 틀렸구나.”

마침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조카가 하도 어이가 없어 이렇게 한 마디 했다.

“아니 숙부님. 한 쪽이 옳으면 한 쪽이 그르고, 한 쪽이 그르면 한 족이 옳은 법이지 이쪽도 옳고 저 쪽도 옳다고 하시면 도대체 어느 쪽이 틀렸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황희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그렇구나. 네 말도 옳구나.”하면서 읽던 책을 계속 읽더라는 것이었다.

성품이 이처럼 너그러우니 집안의 하인과 그 자식들도 어려운 줄을 모르고 제 친 할아비라도 되는 양 어리광을 부리고 심지어는 무엄하게 수염까지 잡아당기는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황희는 한 번도 성내어 꾸짖지 않았다.

이를 보다 못한 부인이 “아유, 집에서 저런 분이 어떻게 정승 노릇을 하며 막중한 나랏일을 보실까”하고 핀잔을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인 말도 옳구려”가 아니라, “하인도 다 하늘이 내려주신 이 땅의 백성인데 어찌 엄하게만 대할 수 있으리오?” 했다고 하니, 그의 따스한 애민정신과 투철한 인본사상, 그리고 여유로운 풍류정신은 시대를 훨씬 앞서갔다고 할 수 있다.

황희는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장단 가조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수(長水), 호는 방촌(?村)이다. 24세 때 문과급제하고, 다음해인 공양왕 2년(1390)에 성균관 학관, 요즘으로 치면 국립대학 교수로 발령받아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황희가 벼슬길에 나선지 불과 2년 뒤인 1392년, 이성계(李成桂)가 나라를 뒤엎고 조선왕조를 개국하자 당시 30세의 황희도 망국의 유신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선배들의 권유에 따라 두문동에서 나와 새 왕조의 관직을 맡았다.

조정에 나아간 황희는 이른바 혁명주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처음에는 왕따도 많이 당하고 좌천에 귀양살이까지 했지만, 청렴결백한 성품에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태종 5년(1405)에는 지신사로 등용되어 이후 형조판서 · 대사헌 · 병조판서 · 예조판서 · 이조판서를 두루 거쳐 세종 8년(1426)에 우의정, 세종 13년(1431)에는 영의정이 되어 이후 세종 31년까지 18년간 청백한 수상으로서 명군 세종의 치세를 뒷받침했다.

영의정에 올라 만백성의 인자한 어버이 노릇을 하던 황희는 노령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했으나 번번이 들어주지 않다가 세종 31년에야 비로소 허락하니 당시 나이 87세였다.

황희는 조정에서는 재상으로서 국사를 공평무사하게 처리했지만 집에 돌아오면 그지없이 너그러워 하인의 자식들이 달려들어 밥을 빼앗아먹고, 수염을 잡아당기고, 심지어는 뺨까지 때려도 그저, “아, 이놈들아. 아프다 아파!”하면서 노여워할 줄 몰랐던 호호야였다.

그는 천성이 검소하여 벼슬이 비록 재상에 이르렀지만 살림살이가 늘 가난했다. 방바닥에 멍석을 깔고 지내면서도, “야, 이 자리가 참 좋구나! 까실까실하여 가려운 데를 저절로 긁어주니 참 좋구나!”할 정도였다.

85세에 조정을 물러난 황희는 건강을 조심하며 조용히 만년의 풍류를 즐겼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는데, 시력을 아끼려고 두 눈을 번갈아 떴다 감았다 하면서 책을 읽었다고 전한다.

창 밖의 복숭아가 익자 동네 개구쟁이들이 이 녀석 저 녀석 몰려와 마구 따먹었다. 방안에서 책을 보던 황 정승 할아버지가 벙긋 웃으며 내다보다가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 이 녀석들아! 다 따먹지는 말아. 이 할애비도 맛 좀 봐야지.”

그리고 나가보니 복숭아가 한 알도 없고 빈 나무뿐이었다. 옳거니! 이제 이 몸도 이 세상에서 할 일을 다 마쳤으니 저세상으로 갈 때가 된가 보구나.

홍안백발이 신선 같았던 만백성의 인자한 할아버지 황 정승은 1452년, 세종대왕이 먼저 떠난 그 이듬해에 향년 90세로 이승살이의 문을 조용히 닫았다.


황원갑 소설가 · 한국풍류사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