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의 향기 ⑥ 원효대사 - 한국 불교 대표적 인물, 서민 속에서 '색즉시공' 전파

무애거사 원효(元曉)가 파계한 것은 그의 나이 40세 무렵이었다. 그가 요석공주(瑤石公主)와 인연을 맺은 것이 태종무열왕 재위시인 654년부터 660년 사이의 일이니 그때 그의 나이가 37세에서 43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한다.

‘성사(聖師)는 어느 날 상례에서 벗어나 거리에서 노래했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려나.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박으리.” 사람들은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태종(무열왕)만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아마도 이 스님은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있으랴.” 당시에 요석궁에는 과부 공주가 있었다. 왕은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궁리가 명을 받아 원효를 찾고 있을 때에 원효가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다가 만나게 되었다.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적셨다. 궁리가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게 하니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공주는 과연 아이를 배더니 설총(薛聰)을 낳았다.’

원효가 파계를 감행했던 요석궁은 경주시 교동 59-2번지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자리에 ‘요석궁’이란 이름의 고급 음식점이 들어서 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흔히 원효는 스님으로서 수행정진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그 뒤에 파계한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위의 기록과 같이 원효는 요석공주에게 자루 없는 도끼, 즉 옥문(玉門 : 陰門)을 빌려달라고 하여 하늘을 떠받칠 기둥, 즉 자신의 ‘물건’으로 설총을 잉태하게 했으며, 이렇게 파계한 다음인 문무왕 1년(661)에 후배 의상(義湘)을 데리고 당나라 유학길을 떠났다가 대오 해탈했던 것이다.

이처럼 파계한 원효였지만 아직까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첫손에 꼽히는 이가 바로 원효이다. 그는 당대 으뜸가는 박학다식한 고승이었을 뿐 아니라 위대한 불교사상가요 학자요 사회지도자였으며 대문장가였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겨레의 스승 원효의 70년에 걸친 파란만장하고 장엄한 발자취는 그대로가 위대한 풍류행이요 일대 서사시였으니, 그가 우리 풍류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젊은 시절 화랑으로 風流道 익힌듯

원효가 태어난 때는 난세였다. 북쪽에는 고구려, 서쪽에는 백제, 동쪽에는 신라가 정립하여 수시로 혈전을 벌이며 패권을 다투던 때였다.

원효는 진평왕 39년(617)에 현재 경북 경산시 자인면인 압량군 불지촌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설씨(薛氏). 부친 담날(談捺)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11위의 하급관리인 내마였고, 조부는 잉피(仍皮) 또는 적대(赤大)라는 이였다.

원효의 본명은 불분명하다. 어떤 기록에는 출가 전의 이름이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라고 했는데 이는 당시 신라군 부대명이기도 하다.

원효와 요석공주의 아들 설총을 중시조로 모시는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 족보에는 원효의 성명은 설사례(薛思禮)요, 시조 설지덕(薛支德)의 5세손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화제를 불러일으킨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 필사본에 원효의 가계를 일러주는 단서가 나와 흥미를 끈다.

즉, 여기에 원효의 부친 설담날의 이름은 보이지 않지만, 조부 잉피가 화랑 중의 화랑인 제7세 풍월주를 역임한 설화랑(薛花郞 : 薛原郞)의 둘째아들로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원효가 출가 전에 화랑이었다는 설도 무시할 수 없고, 만일 그렇다면 화랑으로서 풍류도를 익혔을 것이다.

어쨌든, 원효의 본명은 분명하지 않지만, 그는 뒷날 자신이 태어난 마을인 밤골을 따서 아호를 율곡(栗谷)이라고 했고, 출가해서는 밝은 새벽을 뜻하는 원효를 법명으로 삼았다.

<삼국유사>는 원효의 모친이 유성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기가 있었으며, 해산할 때는 오색구름이 주위를 덮었다고 전한다. 그때 만삭이었던 그의 모친은 남편을 따라 어딘가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부부가 밤골에 접어들었을 때 갑자기 산기(産氣)가 일어나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남편이 황급히 웃옷을 벗어 나무에 걸고 주위를 가린 뒤 자리를 잡아주었다. 그리하여 먼동이 터오는 새벽에 위대한 한 인물이 태어났으니 그가 바로 원효였다.

모친은 그를 낳자마자 곧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오로지 한국불교의 새벽을 밝힐 큰 법등 원효를 낳아주는 단 한 가지 소임만을 위해 이 세상에 왔다가 가는 듯했다.

뒷날 출가한 원효는 자신의 본가를 절로 삼아 초개사(初開寺)라 했고, 자신이 태어난 장소에도 사라사(裟羅寺)란 절을 세웠으니, 사라사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곳에 있던 나무 사라쌍수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원효가 불문에 들기까지 어떻게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는지 일러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나면서부터 남달리 뛰어나게 총명했다는 기록과, 12세에 부친을 잃고 조부 아래서 자랐다는 기록이 전한다.

부친 설담날은 629년 8월 진평왕의 명령으로 풍월주 출신인 김용춘(金龍春)과 김서현(金舒玄)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칠 때 출전했다가 전사했던 것이다. 김용춘은 뒷날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金春秋)의 부친이요, 김서현은 김유신(金庾信)의 부친으로 이들도 역시 풍월주를 지냈다.

그런데 원효가 17세 때에는 조부도 세상을 떠나 원효는 완전히 홀몸이 되었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원효는 ‘총각 나이에 출가하여 일정한 스승이 없이 학문을 닦았으며 노니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다. 교학자(敎學者)의 진영을 쳐부수니 감히 대항할 자가 없었다’고 했다.

황룡사에서 출가, 분황사에 오래 수행

원효의 출가 시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29세설이요, 또 하나는 15, 16세설이다. 필자의 연구로는 조부가 돌아간 직후인 17세 무렵에 출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가 17세에 출가했다면 선덕여왕 2년(633)이다.

그해는 뒷날 원효가 주석하던 분황사가 완공되기 전 해요,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에서 귀국하기 3년 전이다. 당시 신라 불교는 화랑세속5계를 만든 원광법사(圓光法師)가 대국통(大國統)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원광 또한 화랑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그는 제1세 풍월주 위화랑(魏花郞)의 손자요, 제4세 풍월주 이화랑(二花郞)의 아들이며, 제4세 풍월주 보리(菩利)의 친형이었다. 보리는 또한 김대문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백제인 아비지(阿非知)가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고 있던 그 무렵 원효는 황룡사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그는 일정한 스승이 없이 당에서 들여온 수많은 불경과 불교 문헌을 섭렵하고 줄기차게 파헤쳐 독자적인 불교 이론과 체계를 세워나갔다.

원효는 어느 종파 어느 이론에도 치우치지 않고 무엇이든 끈기 있게 깊숙이 파고들어 심오하고 미묘한 불법의 진리를 깨우치고자 노력했다.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진덕여왕이 즉위한 지 4년째 되던 650년, 원효는 34세였다. 그는 보다 넓고 새로운 지식의 바다에서 불법을 연구하기 위해 당나라 유학을 결심했다.

자신보다 8세 연하인 의상과 함께 육로를 통해 고구려를 거쳐 입당하려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붙잡혔다. 간첩으로 몰려 수십 일을 조사받다가 풀려나 그대로 신라로 돌아오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 국토가 겪는 분단의 쓰라림을 원효는 이미 1천 300년 전에 절실히 맛보았던 것이다. 그는 뒷날 설법하면서, “고구려나 백제, 신라는 모두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갈파했으니 그는 참으로 먼 앞날까지 내다본 선지자,선각자였다. <다음 호에 계속>


황원갑 소설가 · 한국풍류사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