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라, 스페인!

늘 머릿속을 맴도는 몇 개의 문장 중에 하나가 바로 ‘여행을 가야 한다!’라는 말이다.

어두운 골목길을 걷다 문득, 늦은 아침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키다 말고 문득, 찬바람 속에서 오래도록 버스를 기다리다 문득, 해야 할 일거리들로 어지러운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문득, 탄식 같은 한숨처럼, 짐짓 절박한 깨달음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다. 여행을 가야 한다!

그 말이 ‘여행을 가고 싶다’라는 막연한 희망사항에 그치지 않고 ‘여행을 가야 한다’라는 의무에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아무래도 ‘작가’라는 직업상의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어떤 분야든 창작자에게 있어 ‘새로운 자극을 통해 얻는 영감(靈感)’이란 절대적으로 필요한 창조의 원천이다. 새로운 자극과 영감이 반드시 여행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여행만큼 새로운 자극과 영감을 얻기에 좋은 기회도 흔치 않다.

그러므로 창작자에게, 예술가에게 여행이란 단순한 ‘휴양’이나 ‘유람’일 수 없다. 여행이 그저 ‘관광’에 그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여행은 신성한 노동의 연장(延長)이다.

여행을 함에 있어 예술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또렷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모든 감각의 촉수를 활짝 열어 열과 성을 다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토록 예민한 영혼이 잡아낸 원석(原石)과도 같은 무언가가, 그 원리를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의 과정을 거쳐 감미로운 선율로, 절절한 문장으로, 아름다운 화폭으로 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여행 경험이 많다는 것은 크나큰 재산임에 분명하다. 때문에 누군가의 풍요로운 여행담을 접할 때면 유달리 부러움과 질투를 느끼곤 한다.

그것은 여행에 관해 아직 변변한 재산가가 아니라는 뜻도 되겠지만, 스스로에 대해 ‘돈 욕심’ 보다는 ‘여행 욕심’이 많다는 인간적인 결론으로 위안을 얻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전혀 속물근성 없이 지고지순 고결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당장 얼마간의 돈이 생긴다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은 받는다면 주저 없이 여행을 떠나겠다고 말할 것이다.

눈여겨 봐두었던 명품 가방이나 블루칩 스톡옵션을 사는 것 대신에 말이다. 감쪽같은 성형수술이나 최신의 벽걸이 티브이 대신, 나는 여행을 떠나고 싶다. 진심이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여행을 계획하고 상상하는 것도 지난 여행을 돌이켜보고 추억하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이다. 실망과 변수가 기다리고 있을지언정 기대와 설렘은 여행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물론 유년시절 살았던 동네를 오랜만에 찾아가보는 한나절 짧은 외출에서부터, 전 재산을 털어 과감히 결행하는 세계 일주까지 여행의 종류와 형태는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어쨌든 여행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해보리라 계획하고 있는 여행이 있기 마련이다. 마음을 먹고 각오를 하기까지가 망설여지는 여행일수록, 알맞은 준비와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지기까지가 쉽지 않은 여행일수록 그에 대한 꿈은 간절해진다.

내 경우 ‘스페인’이 바로 그런 여행지다. 스페인을 여행하게 된다면 몸도 마음도 단단히 채비를 하고 짧지 않은 일정으로 반드시 일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스페인을 오랫동안 흠모해왔다거나 그곳을 파라다이스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일주를 하며 구석구석 살펴보고 싶은 나라가 스페인뿐인 것도 아니다.

스페인은 단연 압도적인 개성을 가진 나라다. 너무나 확고하고 뚜렷한 개성이 버겁게까지 느껴지는 나라다. 단순히 진기한 볼거리가 많기 때문에 스페인으로 전 세계의 여행객들이 몰려드는 것이 아니다.

스페인은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와도 닮지 않았다.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과 예술은 오로지 스페인만의 것이다. 스페인이라는 개성의 핵심은 스페인 전체를 감싸고 있는 특유의 기운, 그 자체다.

스페인은 괴상하고 뜨겁고 음울하고 탐욕스럽고 황량한 나라다. 그러면서도 경이롭고 황홀하고 아름다운 나라다.

스페인에는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집을 지은 아방가르드 건축가 가우디가 있고,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세르반테스의 기사 돈키호테가 있고, 슬프면서도 격정적인 집시의 플라멩코가 있고, 선혈이 낭자하는 잔인한 축제인 투우가 있고, 역사상 가장 정력적인 화가인 피카소가 있고, 너무나 아름다워 파괴할 수 없었던 적(敵)의 성지(聖地)인 알함브라 궁전이 있고, 피비린내 진동하는 내전과 독재와 탄압의 역사가 있고, 대서양과 남미를 제패했던 무적함대가 있고, 머리꼭지가 이글거리는 뜨거운 오후의 시에스타가 있고, 우울과 고통과 죽음에 웃음과 배짱과 예술혼으로 맞선 귀머거리 화가 고야가 있다.

벨라스케스와 달리와 미로도 있고, 로르카라는 시인도 있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게르니카, 그라나다, 코르도바, 세고비아, 안달루시아, 라는 이름의 땅들…….

또한 잘 알려진 대로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축구팬들도 있다. 그들이 스페인을 만들었다기보다는 스페인이 그들을 만들었다.

스페인을 가보지 않고도, 이 정도의 얕은 지식을 갖게 된 것만으로도 왠지 기진맥진해진다. 스페인이라는 에너지를 이루고 있는 그 놀라운 개성 하나하나가 모두 제각각의 우주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정말 스페인을 일주하게 된다면 그것은 스페인이라는 거대한 은하계를 탐사하는 흥미진진한 모험이 될 것이다. 어쩌면 무모하고 위험천만한 여행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기다려라, 스페인!

부럽게도 그 모험을 이미 감행한 시인 김혜순은 <들끓는 사랑>(스페인 여행기로 이보다 더 적절한 제목은 있을 수 없다!)에서 자신을 ‘도냐 키호타’로 명명(命名)한다.

도냐 키호타란 돈 키호테의 여성 명사다. 또한 화가 지망생이자 사춘기 소녀인 자신의 딸은 고분고분하지만은 않은 ‘산초 판자’가 된다.

“내 딸과 나는 스페인을 종횡무진 누비고 나서 스페인 중독자가 되었다. 우리는 어느 기간에 앓았던 병처럼, 아니 기억하지도 못할 광증의 기간처럼 스페인이라는 땅에 귀신들렸다. 나는 그 광증의 시간이 내 몸 속에서 다 녹아 버리기 전에 이 글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책을 펼치면 종횡무진 스페인을 누비는 뜨거운 여름날의 모험이 시작된다. 둘시네아 공주를 구하기 위해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시인 엄마와 소녀 딸! “고통을 끓여 웃음을 만드는”, 그들의 모습은 바로 스페인을 닮았다.


이신조 소설가 coolpond@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