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모국어

▲ <통역사> 표지
‘이민(移民)’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 개인이나 집단이 항구적 또는 장기에 걸쳐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의 영토로 이주하는 일.

대한민국 외교통상부가 2년마다 조사하는 ‘해외거주 외국국적 동포 및 재외국민 현황’에 따르면 2005년 4월을 기준으로 현재 외국에 머무르고 있는 재외동포의 수는 663만 8,0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중국, 미국, 일본은 물론 유럽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이르기까지 그 국가 수도 무려 173개국이나 된다고 하니, 그야말로 세계 어디를 가든 그곳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이 통계는 정식 이민 외에 취업이나 유학 등을 목적으로 해외에 체류하고 있는 사람들도 포함된 숫자다.)

흔히 ‘이민자’ 하면 유대인이나 중국의 화교(華僑)를 떠올리게 된다. 유대인의 경우 민족의 역사가 곧 ‘유랑의 역사’라고 할 만한 특수한 배경을 지녔고, 중국의 화교는 달리 ‘화상(華商)’이라 불릴 정도로 대부분 상업과 무역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제 ‘코리언’ 역시 세계적인 이민자라 부를 수 있게 된 듯하다. 앞서 언급한 통계를 남북한 인구와 대비시켜 보면 한민족 열 사람 중의 한 사람은 외국에 나가 살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전 세계 5천5백만에 이른다는 화교도 10억이 넘는 중국 인구를 감안한다면, 우리의 이민자 비율이 더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이민의 역사는 19세기 말 러시아와 중국으로 이주해간 소수의 조선인들과 대한제국 시절이던 1903년 하와이의 ‘애니깽’ 농장으로 102명의 한인들이 정식 노동 이민을 떠난 것을 그 시작으로 하고 있다.

이후 일제 강점기 궁핍과 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많은 농민들이 식민지가 되어버린 고향 땅을 등지고 중국의 간도지방으로 이주해 한인촌을 형성하였는데, 그것이 지금의 연변 조선족자치구를 이루게 되었다.

우리는 또한 역사적 정치적 이유로 러시아와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이 그 어느 해외동포들보다 지난한 세월을 감내해왔음을 알고 있으며, 해방 이후 60년대 경제 차관을 목적으로 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이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유럽 이민사(史)의 첫 페이지를 써내려갔는지도 알고 있다.

물론 세월이 흘러 이제 이민의 성격도 천차만별이다. ‘기러기 아빠’로 대변되는 교육 이민, 90년대 외환위기 이후 다시 등장한 생계형 이민, 또한 투자 이민, 노후 이민, 웰빙 이민 등도 최근엔 그다지 낯선 단어가 아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해외 이민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은 바로 ‘아메리칸 드림’일 것이다.

‘미국’이란 거대한 이데올로기 - ‘기회와 약속의 땅’, 그 한 마디는 고국을 떠나 이국에서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낯선 땅에 도착해 두려움과 기대 속에서 처음으로 되뇌었을 말일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경제력과 정보력이 떨어졌던 시절, 사람들은 미국이란 나라를 지구상에서 가장 막강한 힘과 부를 가진 신천지이자 파라다이스로 여겼다.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삶과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수많은 사람들이 태평양을 건넜다.

여기 그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던 소녀가 있다. 한국에서 태어난 소녀는 열세 살이 되던 해,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갔다. 물론 이민은 소녀의 선택이 아닌 부모의 선택이었다.

소녀의 이름은 수키 김. 소녀는 자라 여자가 되었고, 소설가가 되었다. 그녀가 살아온 삶에 대해 우리가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대신 그녀는 <통역사>라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모든 소설가가 그러하듯이, 자신의 지나온 시간을 글 속에 내밀하게 삼투(渗透)시키고 있다.

수키 김은 ‘수지 박’이라는 자신과 동년배의 주인공을 내세워 이민 1.5세대가 겪은 이민자 가정의 고통과 불행을 담담하면서도 절박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은 모두가 장밋빛으로 꿈꿨던 ‘아메리칸 드림’이 얼마든지 악몽의 주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괴롭게 상기시킨다. 막연한 희망이 어떻게 구체적인 절망으로 변질되는지, 상처와 괴리가 어떤 모순과 비극으로 증식하는지를 작가는 생생한 질감의 문장으로 묘사한다.

소설 속 수지의 부모는 어린 두 딸과 미국에 정착해 살기 위해 휴일 없이 일주일 내내 일하며 고단한 이민자 가정을 꾸려간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꿈꾸었던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지 못한 채, 끝내 영어조차 마스터하지 못한 채 비극적인 죽음을 맡는다.

이 소설은 수지가 부모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추리 형식으로 전개된다. 그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다른 한인 이민자들과 오래 전 자신처럼 가족을 등진 언니 그레이스다.

수지는 고국이든 이국이든, 세상 그 어디에서든 인간은 자신의 아픈 상처와 대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수지는 기나긴 외면과 도피를 끝낸다. 하여 이 소설은 슬픈 만큼 아름답다. 절망의 에너지만큼 희망의 가능성을 남겨둔다.

제목이 말해주듯 소설 속의 수지는 ‘통역사’다. 한국어와 영어 - 모국어와 외국어, 타인과 자신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존재. 통역사는 수지에게 직업으로의 의미보다 삶 자체로의 의미가 된다.

“수지는 지방 검사보의 이야기를 들으며 중요한 단어를 수첩에 적는다. 통역을 할 때는 아무리 문장이 길더라도 모든 단어를 정확히 옮겨야 한다. 통역사는 수학자하고 비슷하다. 그녀는 방정식을 푸는 것처럼 언어를 대한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동의어와 맞추어야 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정답을 얻을 수 있다. (......) 그녀는 단어를 들으면 사전적인 의미와 함축적인 의미를 분리한다. 직역은 오역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언어는 논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통역사는 단어를 그대로 옮기면서도 이쪽 언어와 저쪽 언어 사이의 간격을 교묘히 메울 줄 알아야 한다.(......)”

한국어에 능통할 것이라 추측되는 수키 김은 이 소설을 영어로 썼다. 이제 외국어가 그녀에게 더 익숙한 언어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통역사로든 소설가로든 그녀에게 모국어란 너무 슬픈 언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신조 소설사 coolpond@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