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사유, 지구의 꿈

우리는 가끔 우리를 압도하는, 말 그대로 외마디 감탄사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자연경관과 마주하게 된다.

만년설에 뒤덮인 해발 수천m의 고산이나 거친 모래폭풍이 불어오는 황량한 사막, 깎아지른 붉은 협곡과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망망대해. 우리는 개마고원이나 이과수 폭포나 그랜드 캐니언이란 이름을, 남극의 오로라와 아마존의 정글과 스칸디나비아의 피오르드를 알고 있다.

그런 자연경관을 접할 때면 ‘조물주의 신비’라는 진부하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는 관용적인 표현을 하릴없이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감탄이나 찬미 대신 충격이나 경악으로 다가오는 자연도 있다. 자연은 종종 단순한 풍광을 넘어 강력한 현상으로 제 존재를 드러내기도 한다.

모든 것을 한순간에 휩쓸어버리며 엄청난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폭우와 가뭄, 또 위력적인 지진이나 해일 앞에서 인간은 자신이 이룩해 놓은 고도의 문명이 무색해질 정도로 나약한 존재가 되고 만다.

찬미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두려움과 절망으로 다가오는 자연에 대해 인간은 모순과 혼란을 느낀다. 그러나 시인 이성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완벽은 인간의 꿈이지 자연의 몫이 아니다. 자연은 완벽을 꿈꿀 만큼 어리석지 않다. 자연이 어리석게 보이는 순간조차, 어리석음은 자연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몫이다. 인간의 지혜는 자연이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순간에도 더할 나위 없이 지혜롭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서 가장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사진이란 ‘감탄이나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이 아니라 ‘생각에 잠기게 하는 사진’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종종 전쟁의 잔인한 참상을 고발하는 한 장의 보도사진보다, 오래된 사진첩에서 우연히 발견한 어머니의 소녀 시절이 담긴 빛바랜 흑백사진에 더욱 마음이 가는 이유일 것이다.

그 사진의 구도나 노출이 결코 훌륭하다고 할 수 없음에도 우리는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열다섯의 단발머리 어머니를 두고두고 떠올리게 된다.

오래도록 생각에 잠기게 한다는 것. 그것은 분명 한순간의 강렬한 압도 이상으로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인간에게는 일시적인 충격보다 깊은 사유가 더욱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압도하는 자연이 아닌 ‘사유하게 하는 자연’ - 시인 이성복은 그것의 본보기를 제주도의 기생화산인 ‘오름’에서 찾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제주는 오래 전 화산폭발로 생겨난 섬이며, 제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한라산이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오름이란 ‘야트막한 동산 모양의 기생화산’을 가리키는 제주방언으로, 제주에는 한라산 기슭에서부터 섬 전역에 걸쳐 모두 368개의 오름이 산재해 있다.

얼핏 신라 경주의 거대한 왕릉들을 떠올리게도 하는 오름은 오직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자연경관으로, 자연생태의 보고인 동시에 제주 사람들만의 역사와 정서가 깃든 삶의 터전이자 영혼의 안식처로 여겨지고 있다.

이성복은 먼저 제주의 사진작가 고남수가 찍은 오름 사진들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이 직접 제주를 여행하면서 본 오름의 모습을 더해 ‘생각에 잠기’고, 삶의 의미와 예술의 가치에 대해 ‘사유’한다.

부드럽고 완만하게 솟아오르고 흘러내리는, 그러면서도 육중한 몸짓으로 굳건히 대지를 딛고 넉넉히 하늘을 떠받드는 오름 특유의 곡선은 한국의 전통적인 태극문양을, 아름다운 여인의 풍만한 몸매를, 파충류나 양서류의 죄 없는 두 눈을, 굴곡 많은 인생 역정 끝에 모진 병을 얻어 복수가 차오른 피붙이의 부푼 배를 우선 떠올리게 한다.

그런 후에 그것은 시인의 눈 맑은 영혼을 통해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 미(美)와 시(詩)의 진정한 가치에 접근한다.

“기껏해야 언어는 풀잎이 풀잎답다거나 갈대가 갈대답다는 동어반복으로써 대상 앞에서의 무력감을 표현할 뿐이다. 그 무력감의 고백이야말로 언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며, 그 겸허한 결단에 의해 대상은 관념과 이미지로 이루어진 언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런 점에서 언어의 자기부정을 통해 사물의 본성을 드러내는 시 또한 ‘살신성인’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성복의 산문 <오름 오르다>는 한때 뜨거운 용암으로 들끓었던 땅 속 깊이 지구의 오랜 꿈과 아름다운 기억이 감춰져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꿈과 기억을 언어라는 도구로 조심스럽게 발굴해내는 것이 바로 시인이란 존재임을 알게 된다.

“달리 말하자면 아름다움은 자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허물어져 가는 봉분이나 습기 먹어 곰팡이 핀 벽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것들이 이미 자연의 경계 안으로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결코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없지만, 그러나 드러나게 할 수는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아름다움이 자연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에서뿐만 아니라, 인간 안에서도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인간 자신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아름다움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며, 궁극적인 발견은 이 세상 어느 것도 자기 손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다는 발견이다.”

시인은 사유하고 지구는 꿈을 꾼다. 아니 어쩌면 시인이 끊임없이 치열하게 사유하기 때문에 지구가 계속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이를테면 세계 안에서 예술은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 속에서 지르는 외마디 소리와 같다. 그 소리는 영문도 모른 채 갇혀 있는,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해 영문도 모른 채 갇힌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의 온갖 슬픔이 버무려진 비명인 동시에,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출구를 향한 구원의 울부짖음일 것이다. 그러나 벽에 부딪쳐 돌아 나오는 그 소리는 때로 몹시도 아름다워서, 그 소리를 지르게 만들었던 슬픔조차 가라앉히고 끝내 찾을 수 없는 출구, 애초에 있지도 않은 출구를 대신하기도 한다. 요컨대 슬픔의 극단에서 인간의 입에서 터져 나온 울부짖음은 더할 나위 없이 고운 소리로 그의 귀에 되돌아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 울음이 음악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동굴의 입구와 출구가 철저히 폐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트인 동굴에서였다면 비명 소리를 내지를 리 없고, 질렀다 해도 그 소리가 그토록 아름다운 메아리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신조 소설가 coolpond@@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