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알렌 감독 '매치 포인트'

테니스, 배드민턴, 탁구 등의 경기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마지막 점수를 뜻하는 ‘매치 포인트’는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을 가름하는 인생의 기로와 같다.

혹여 그 절체절명의 순간 네트 꼭대기에 공이 걸려 솟구쳐 오르기라도 하면, 어느 쪽으로 공이 넘어갈까를 바라보는 관중들은 마른 침을 삼킨다. 어느 쪽으로 넘어가느냐는 순전히 운에 달렸지만, 이 짧은 우연의 순간은 경기의 향방을 완전히 굴절시킬 수도 있는 결절점으로 작용한다.

염세주의적인 뉴요커 감독 우디 알렌의 신작 <매치 포인트>는 운명에 의해 관장되는 것이 스포츠 게임만이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가는 인생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욕정과 욕망의 포로들

한때 주목 받는 테니스 선수였다가 지금은 상류층 테니스 강사가 된 크리스 윌튼(조나단 라이 메이어스)은 부잣집 장남 톰(매튜 굿)의 테니스 선생 노릇을 하게 된다.

톰을 통해 그의 여동생 클로에(에밀리 모티어)와 사귀게 된 크리스는 그녀를 통해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루려는 야심가로 변모한다. 그런 크리스 앞에 톰의 약혼녀 노라(스칼렛 요한슨)가 나타나고, 노라의 치명적 매력에 이끌리면서도 그는 클로에와 결혼한다.

이후 톰과 노라가 파혼하자, 크리스는 다시 노라에게 접근해 불륜관계를 맺는다. 두 여자 사이에서 벌이는 크리스의 위험한 줄타기는 도를 더해가지만 노라의 질투와 집착으로 점점 궁지에 몰린다.

뉴욕을 배경으로 중산층 계급의 허위의식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로 유명한 거장 우디 알렌은 인생의 아이러니와 회한, 모순덩어리 인간의 정체성 등 니힐한 테마를 비틀린 코미디로 연출하는데 능한 감독이다.

그의 코미디는 대개 상황의 아이러니와 인물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 양식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지만 <범죄와 비행>이나 <또 다른 여인> 등의 영화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주제인 범죄와 처벌, 욕망과 시기, 인간의 이중성 따위의 화두를 정면으로 다루기도 했다.

사회적 규범과 욕망 사이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어처구니없는 행위와 그에 따른 대가 또는 뼈저린 교훈을 통해 우디 알렌식 블랙 유머를 유감없이 확인할 수 있다.

<매치 포인트>는 한 인간의 욕망과 죄의식이 겨루는 전쟁을 집요하게 쫓아간다. 인물의 대사는 그들이 둘러쓴 허위의 가면이다.

크리스는 장래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지를 묻는 클로에의 질문에 “뭔가 사회에 공헌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는 순진한 부잣집 딸에게 ‘돈이나 노리고 결혼하는 속물’로 낙인찍히지 않으려는 포석이다.

톰의 약혼녀 노라에게 끌리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면서도 클로에의 환심을 사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크리스의 주도면밀한 행동들은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음험한 속내를 낱낱이 드러낸다. 허위와 위선이 크리스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톰은 출신성분이 다른 가난뱅이 배우 지망생 노라를 버리고 부모님이 원하는 여자와 결혼하면서 “노라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뿐”이라고 강변한다.

노라 역시 부잣집 아들 톰의 배경에 끌렸지만 크리스에게는 “톰의 잘생긴 외모 때문”이라고 자신의 로맨스를 정당화한다. 속사포 같은 대사를 전매특허로 삼았던 알렌의 이전 영화들과 달리, <매치 포인트>는 말해진 것 이면에 담긴 함의에 더욱 주목한다.

우디 알렌식 '인간의 조건'

<매치 포인트>는 철저하게 이중생활을 유지하는 크리스의 불안한 심리에 다가가면서도 그에게 완전히 동화되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한다.

노라와 크리스가 비밀스럽게 나누는 격렬한 정사는 섹슈얼하거나 로맨틱하기보다 우스꽝스럽고 초라하게 연출됐다. 알렌은 선남선녀의 아름다운 육체를 과장스럽게 포장하지 않고 이기적인 쾌락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한다.

시종일관 들려오는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 나오는 아리아 ‘남몰래 흐르는 눈물’ 또한 애절한 사랑을 노래한 가사와 무관하게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행해지는 거짓과 위선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크리스가 벌이는 이중성의 게임이 흥미진진해지는 것은 노라의 임신이라는 사건을 통해 그가 곤경에 처하면서부터다.

클로에의 완벽한 남편 노릇을 하면서 틈만 나면 노라와 정사를 즐기는 크리스는 안락한 가정과 위태로운 외도 둘 모두를 즐기지만 노라의 집착과 임신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노라와 클로에, 사랑과 돈, 진심과 허위 사이에서 패닉 상태에 빠진 크리스의 행위는 이 때부터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치정 스릴러로 방향이 바뀌면서 영화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결말을 예비해두고 있다.

알랭 들롱이 주체할 수 없는 야심에 사로잡힌 아름다운 청년으로 나왔던 <태양은 가득히>가 연상되는 이 영화는 <태양은 가득히> 마냥 어긋난 욕망의 대가를 치루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영화는 오히려 정의나 도덕, 윤리와 같은 덕목들이 단지 희망사항에 불과한, 벌거벗은 인간의 가장 추악한 일면이라는 걸 냉정하게 응시한다. 우디 알렌은 극중에서 크리스가 열심히 탐독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말하고 있는 인과론적 도덕률을 따르는 대신, 비이성적인 세계에 던져진 유약하기 짝이 없는 부조리한 인간의 조건과 대면토록 만든다.

그것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는 아들, 자식을 갈갈이 찢어 죽이는 어머니가 등장하는 그리스 비극의 세계이다.

되풀이되는 악행의 근원은 오로지 나약함과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 또한 받아들여야만 하는 인간 존재의 조건임을 냉엄하게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