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크 리 감독

1980년대 블랙시네마의 선두주자였던 다혈질의 흑인 감독 스파이크 리가 처음 메이저 스튜디오와 손잡은 영화 <인사이드맨>은 일견 전형적인 은행강탈 영화처럼 보인다.

은행털이범과 인질, 그리고 형사의 두뇌 싸움이라는 소재는 할리우드 액션 장르의 흔해 빠진 상투형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영화의 전개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굴절되고 엉뚱한 방식으로 결론을 맺는다.

<모 베터 블루스>에서부터 스파이크 리의 페르소나였던 덴젤 워싱턴과 작품 선택이 까다로운 지적인 여배우 조디 포스터, 클라이브 오웬 등 할리우드의 내로라하는 실력파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이 영화에 ‘액션 스릴러’라는 꼬리표는 외피일 뿐이다.

인종적 이슈를 통해 미국사회의 폐부를 찔렀던 스파이크 리의 반골의식은 여기서도 변함없이 확인된다.

백주대낮, 뉴욕의 은행이 털리다

뉴욕 월스트리트의 한 은행이 정체불명의 괴한들에 의해 점거된다. 50여 명의 고객을 인질로 삼은 대형 은행강도 사건이다. 엄청난 경찰 병력이 투입되고, 베테랑 협상전문가 형사 키스 프레이저(덴젤 워싱턴)가 사건 총지휘를 맡는다.

괴한들의 리더 달튼 러셀(클라이브 오웬)은 프레이저에게 제트기를 요구하고, 프레이저는 은행강도들이 노리는 것이 돈만이 아님을 눈치챈다. 그 즈음 사건을 보고받은 은행 총수 아서(크리스토퍼 플러머)는 그 은행에 자신이 숨겨놓은 모종의 ‘물건’을 보호하기 위해 베테랑 변호사 매들린(조디 포스터)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매들린은 프레이저를 회유하여 러셀과 일대일로 만나고, 뜻밖에도 러셀 또한 그 문제의 물건을 노리고 이곳에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아서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애쓰는 문제의 그 물건이다. 아서의 과거와 관련이 있어 보이는 이 ‘물건’을 두고 벌이는 게임의 최후 승자는 누구일까? 그토록 지키려고 하고 뺏으려고 하는 문제의 물건은 과연 뭘까?

계획을 성공리에 마친 달튼 러셀이 관객들을 향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되는 <인사이드맨>은, 뒤이어 등장하는 사건이 이미 과거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은행이 점거되고 경찰이 동원되는 사건 전개와, 사건 종료 후 풀려난 인질들의 인터뷰 화면들이 교차 편집되어 보여지면서 영화는 마치 퍼즐처럼 뒤얽힌다.

사건이 종료된 후의 인질들 인터뷰가 인질범과 경찰의 대치 줄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면서, 이야기 순서는 뒤죽박죽된다. 이야기의 선형성이 파괴되고 인물들도 전형성을 탈피하면서, 액션 장르처럼 보였던 영화의 진짜 의도가 드러난다.

영화의 구조 뿐 아니라 캐릭터의 행위도 예측불허다.

인질범들은 인질들에게 자신들과 같은 옷을 입힘으로써 경찰들의 혼란을 유도한다. 인질들이 하나씩 풀려날 때마다 인질인지 범인인지 알 수 없는 경찰들은 당황하고 강도들의 목적이 돈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영화는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이 순간부터 스파이크 리는 뉴욕 한복판에서 벌어진 9.11 테러 이후 미국인들의 혼란스런 감정을 묘하게 환기시킨다. 9.11이 야기한 테러에 대한 공포증, 즉 더 이상 적과 아군이 구분되지 않고,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다는 뼈아픈 자각과 그에 따르는 혼란은 은행강탈범들이 자신들의 계획을 진행시키기 위한 절대 요소로 기능한다. 이 때 은행강도 장르로 시작했던 <인사이드맨>은 9.11 이후 미국의 신경증과 공포증에 대한 첨예한 보고서로 탈바꿈한다.

9.11 이후의 미국의 삶

<인사이드맨>으로 데뷔한 러셀 게위츠의 꽉 짜여진 각본은 예측불허의 게임으로 스토리를 직조해나간다. 그러나 치밀한 반전이 거듭되는 영화에 강렬한 생기를 불어넣은 장본인은 스파이크 리이다.

스파이크 리는 ‘액션 스릴러’ 장르의 틀을 빌어 교묘하게 변형시킴으로써 9.11 이후 미국사회에 대한 세련된 논평을 하고 있다.

미국 현대사의 전환기적 사건이라는 ‘9.11’이후 뉴욕, 나아가 미국이 경험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공포를 낱낱이 까발린다.

인질극, 폭탄 테러, 공개 처형, 복면 쓴 괴한 등 9.11과 알 카에다 테러리스트의 이미지를 동원하면서 <인사이드맨>은 이 모든 상투구들을 뒤집는 구성으로 별난 재미를 선사한다.

스파이크 리는 액션이나 서스펜스뿐 아니라 다양한 인종적, 사회적 편견에 노출된 일반인들의 삶과 사고방식을 포착하고 있다.

터번을 두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테러범 취급 당하는 시크교도, 흑인들 사이에서도 흑인을 패배주의자로 낙인 찍는 비디오 게임, 만연하는 흑인 범죄로 인해 인종주의자가 되어버린 말단 백인 경찰 등, 영화는 은밀한 방식으로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을 영화 속에 심어놓는다.

가장 오락적인 할리우드 장르를 선택한 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현실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이 추상처럼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이야기 구성뿐 아니라, 캐릭터 설정에 있어서도 <인사이드맨>은 스타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 이미지들을 비튼다.

강직하고 올바르며 지적인 흑인 남성으로 인식되는 배우 덴젤 워싱턴은 이 영화에서 적당히 시류에 영합하면서도 배짱 두둑한 망나니 형사 키스 프레이저를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덴젤 워싱턴의 변화는 한편으로 감독 스파이크 리의 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 신랄하게 인종 차별을 비판하는 스파이크 리의 전작들(<모 베터 블루스> <말콤X>)에서 활약한 바 있는 덴젤 워싱턴은 관점과 접근에 있어서 놀랄 만큼 유연해진 <인사이드맨>에서 새로운 파트너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토박이 뉴요커인 스파이크 리만큼 9.11과 이라크 전쟁 이후 달라진 미국의 상황에 적절한 대응법을 찾아낸 감독은 없는 듯하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