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민족 다문화가 공존하는 서구사회에서 특히 존중받는 두 가지 정신이 있다.

바로 프랑스의 똘레랑스(Tolerance)와 미국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다. 하지만 반대로 다민족 다문화가 공존하는 듯하지만 결코 화합하지 못한 사회일수록 이러한 정신이 강조되는 것일 수도 있다.

똘레랑스의 프랑스가 아이러니하게도 아랍계 이민족들의 소요사태로 시끄럽고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우는 미국이 항상 불법 이민자들의 인권문제로 탈이 많은 걸 보면 말이다.

실상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정치, 사회, 교육을 망라해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일례로 미국에서 교과서를 제작할 때 정치적 올바름과 관련된 지침서를 바탕으로 여성, 소수민족,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는 표현은 삼가야 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를 고려하다보니 종종 우스꽝스러운 일들도 일어난다.

험난한 산행에 성공한 시각장애인을 다루는 글이 산간지방 생활에 낯설어 하는 평지 거주 학생들을 배려한다는 이유로, 시각장애인의 등정이 일반인보다 어렵다는 것이 편견이라는 생각 때문에 삭제된 것이 그 한 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이 실제 일상적 올바름으로 이어지지 않는 데 있다. 교과서가 아무리 흑인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중립적인 단어로 지칭하려 해도 미국사회는 여전히 그들에게 편파적이기 때문이다.

영화 '휴먼 스테인'은 이처럼 미국인이 신봉하는 정치적 올바름의 아이러니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는 1998년 냉전 종식 후 테러시대가 열리기 전 미국이 클린턴의 지퍼게이트로 떠들썩할 때의 일이다. 미 동부 해안의 한 대학에서 유태인 최초로 고전학을 강의하는 노교수 콜맨은 수업도중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사임하게 된다.

강의에 번번이 결석하는 학생들을 유령이란 의미의 ‘스푸크(Spook, 유령이라는 사전적 뜻과 흑인을 비하하는 2차적 의미를 지닌 단어)’라 불렀는데 하필 그 학생들이 흑인이었던 것이다.

콜맨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주변에 도움을 청하지만 모두들 냉담한 반응을 보일 뿐이고 그 와중에 충격으로 부인마저 세상을 뜬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아군을 잃어버린 듯한 콜맨에게 새로운 인연이 나타난다. 숲 속에서 은닉생활을 하는 소설가 추커만과 남편의 폭력과 아이의 죽음으로 삶의 의미를 상실한 여성 포니아 팔리. 이 둘과의 교감 속에서 점점 콜맨의 태생적 비밀이 드러난다.

흑인 부모와 형제를 부정하고 유태인으로서 삶을 선택한 콜맨은 자신에게 흑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평생 비밀로 간직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흑인인 자신이 아이러니하게도 흑인을 차별하는 인종주의자로 낙인찍히게 되면서 그는 자신이 버렸던 가족과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한 평생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이 ‘인간의 오점(휴먼 스테인)’이라고 여겼던 콜맨. 하지만 인종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영화 제목대로 휴먼 스테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사회가 지닌 오점이다.

그런데 이 오점은 단순히 표피적인 정치적 올바름을 지지한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스푸크’라는 차별적인 호칭을 시정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은 흑인임을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든 미국 사회의 냉담함과 뿌리깊은 멸시를 불식시키는 일일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도 혼혈인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면서 이전에 혼혈인을 비하하는 말로 쓰였던 호칭을 고치고 신조어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야단이다. (아시아계 혼혈인을 코시안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이에 대해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그들을 어떻게 지칭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을 어떻게 감싸안을까에 대한 고민이다.

호칭과 표현에 있어서 정치적 올바름을 그토록 따지는 미국이 여전히 인종차별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보면 차별은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네 마음가짐의 문제에서 오는 것임을 새삼 알 수 있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