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 / 다카사키 소지 지음 / 이규수 옮김 / 역사비평사 발행 / 12,000원

국어사전을 펼쳐 ‘식민’(植民)의 뜻을 살펴 보자.

본국과 종속 관계에 있는 땅에 자국민을 영주의 목적으로 이주시켜 경제적 발전을 꾀하는 일, 또는 그 이주민을 의미한다. 즉 식민지는 한 국가의 주권을 빼앗아 확보한 영토에 제 나라 사람들을 대거 뿌리내리게 하는 일로 완성되는 셈이다.

1910년 일제에 강점된 이래 조선에도 최대 75만 명(당시 조선인 인구는 2,000만 명에 못 미쳤다)의 일본인이 건너와 식민통치의 실핏줄 노릇을 했다.

한국 근현대사 전문가 다카사키 소지 교수가 쓴 이 책은 개항 때 조선에 첫 발을 들인 후 2차대전 패배로 도망치듯 귀환할 때까지 일본인 식민들이 보인 72년간의 행태를 다루고 있다. 국내에서는 거의 연구되지 않은 분야라 더욱 흥미롭다.

일본인이지만 조선 식민지배를 바라보는 필자의 시선은 시종일관 냉정하고 비판적이다.

당시 작성된 통계·기록 등의 사료와 조선 내 일본인사(史)를 다룬 논문을 꼼꼼히 종합해 “일본 식민지 지배의 특색을 실증적으로” 밝히고자 한다면서 그는 집필의 최종 목적을 “조부모와 부모의 잘못을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한 담보를 획득”하는 데 둔다.

일본이 저지른 오욕의 역사에 대해 무거운 마음을 감추지 않는 글쓴이의 태도는 한국인 독자에게야 당연히 흡족한 것일 테지만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소간 도식적이라 아쉽다. 아무렴 같이 섞여 사는데 일본인은 늘 잔혹하기만 하고 조선인은 항상 당하기만 했으랴.

식민지로의 이민은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국가적 정책이었지만 개인에게는 본국에서 못다 이룬 ‘인생 역전’의 꿈을 실현시키려는 발버둥이기도 했다. 그래서 패배감의 콤플렉스를 떨쳐버리려고 바다 건너온 일본인들은 조선 땅에서 성공적 삶을 누리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1876년 강제 개항된 부산으로 잽싸게 몰려든 일본인 수백 명의 직업을 훑어보면 고리대금과 도매업자가 태반이다. 고리대업자는 이자 징수보다 담보로 잡은 토지를 점유하는 데 혈안이 됐고, 도매업자는 조선인과 맺은 약속보다 싸게 물건을 매입하는 식의 불법 거래에 거리낌이 없었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의 혼란기에는 피난민의 빈 집을 헐값에 사들여 부동산 부자로 등극한 이들도 상당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물론 이주민들은 침략 전쟁을 벌이는 자국 군대에게 숙박을 비롯한 편의를 제공하는 등 본국의 기대에 여러모로 부응했다. 관(官)의 은근한 지원 하에 조선에 건너온 낭인 무리는 껄끄러운 민씨 정권을 전복하고자 동분서주하며 ‘정치 깡패’ 노릇을 톡톡히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을 계기로 일본인 이민자의 수는 급격히 늘어난다. 조선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후쿠오카·나가사키 등지에서 특히 많은 인구가 유입된다.

식민통치가 본격화된 후로는 도쿄의 엘리트들이 관리로 취직해 조선을 찾는다. 거주 지역도 부산·인천·원산 등 개항장에 머물지 않고 한성·평양을 비롯한 여러 도시로 급속히 늘어난다.

특기할 점은 조선에 온 일본인 중 직접 농사를 짓는 자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설령 그럴 생각으로 이주한 사람이더라도 식민지 당국이 내준 땅에서 조선인 소작농을 거느리는 지주로 금세 신분이 상승한다. 그리하여 일본인 식민들은 조선인의 위에 군림하거나 동족의 수하에서 일하면서 그들만의 특권적·배타적 영역을 구축한다.

이렇다 보니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가 조선의 병참기지 역할을 강화하고자 독려한 ‘내선일체’는 조선인에게만 해당될 뿐, 일본인에게는 등한시되는 아이러니를 빚는다.

일례로 한 내선공학 여학교를 다녔던 일본인 가운데 조선인 친구를 사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낯선 조선 땅에서 성(性)을 팔았던 일본인 작부·창기의 숫자가 많았다는 사실은 여성의 권리에 무심했던 일본 식민주의의 뿌리깊은 야만성을 드러낸다.

일본 제국주의 역사의 종언은 결국 이런 미시적 균열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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