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의 향기 ⑮ 토정 이지함 (下)

토정은 어디에 뛰어난 인물이 있다면 만사 제쳐놓고 찾아가 만났는데,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남명(南冥) 조식(曺植), 우계(牛溪) 성혼(成渾), 율곡(栗谷) 이이(李珥) 등과의 교유가 그렇게 이루어졌다.

박현석의 ‘사우록’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토정이 젊었을 때 화담의 학식이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배우고자 송도(개성)로 찾아갔다. 낮에는 화담에게 글을 배우고 밤에는 객사에서 잤다. 객사의 바깥주인은 행상이었는데 그의 아내가 젊고 예뻤다.

어느 날 안주인이 서방더러 장사 나가기를 권했다.

지아비가 행상을 떠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누라가 전에 없이 아양을 떨며 장삿길을 재촉한 것이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멀리 떠난 척하고 마을을 빠져나온 다음 그날 밤 몰래 집으로 돌아가 바깥에 숨어 동정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여우같은 여편네가 짐작했던 대로 토정의 침소에 들어가 갖은 교태를 부리며 열심히 꼬리를 치고 있었다.

서방이 일이 어찌 되는가 지켜보자 토정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의관을 바로 갖추고는 엄숙하게 남녀가 유별한 인륜도덕을 깨우쳐주는 것이었다. 온갖 교태로 아양을 떨던 마누라가 마침내 부끄러움에 못 이겨 잘못을 빌었다. 이런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던 서방은 단숨에 화담에게 달려가 말했다.

“소인의 집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사온데 참으로 괴이합니다. 혼자 보기 아까워 감히 아룁니다.”

화담이 그 말을 듣고 객사로 찾아가보니 과연 사내의 말이 틀림없었다. 탄복한 화담이 방안으로 들어가 토정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학업과 수양은 이미 내가 가르칠 경지를 넘어섰구려! 원컨대 돌아가는 것이 좋으리라.”

화담은 토정보다 28세 연상인데, 그때 혹시나 자신이 그 옛날 명기 황진이(黃眞伊)로부터 유혹을 당했던 사건을 떠올리지는 않았을까.

남명과의 만남도 비상했다. 토정이 처음으로 남명을 찾아가니 16세 연상인 남명이 뜰 아래까지 내려와 반겨 맞으며 대접이 극진했다. 당황한 토정이 말했다.

“존장께서 어찌 일개 야인에 불과한 후배를 이토록 후대하십니까?”
남명이 웃으며 대답했다.
“범상치 않은 그대의 풍모를 보고 내 어찌 천하에 명성 높은 토정을 몰라 보리오?”

그 뒤 남명이 서울에 왔다가 하인에게 술과 안주를 들려 한강변 토정의 집 토정으로 찾아왔다. 토정이 의관을 갖추고 토굴 같은 토정 안으로 남명을 맞아들였다.

“존장께서 이처럼 누추한 데까지 어인 행차이십니까?”
“지나던 길에 들른 것이외다. 술과 안주는 내가 장만해왔으니 상이나 봐오소!”

그리하여 두 풍류고사가 마주앉아 권하고 마시면서 고금의 일화부터 학문과 시사(時事)에 이르기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날 토정의 학식과 인품을 눈여겨보고 탄복한 남명이 이르기를 “그대야말로 도연명(陶淵明)에 못지않은 고매한 선비”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하니, 그 옛날 풍류 군자들의 멋스러움이 이와 같았다.

토정은 남루를 걸치고 삿갓 쓰고 죽장 짚고 팔도강산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런 차림새로 주유하고 당대의 내로라하는 고관대작과 명사들을 만나는데 조금도 거리낌 없었다.

토정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혹인기사’라는 책에 나온다.

‘선생은 키가 보통사람보다 훨씬 컸고 골격도 건장했다. 또 얼굴이 검으면서도 둥글고 살집이 좋았다. 발 길이는 한 자가 거의 다 되었으며, 목소리 또한 맑고 우렁찼다. 말수가 적었으며 기개가 당당했고 위풍이 늠름했다.’

이 책은 또, 토정이 늘 저자와 산수 간을 돌아다니다가 잠이 오면 두 손으로 지팡이에 의지해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숙인 채 잠이 드는데, 코고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소나 말도 놀라 도망치기 일쑤였다고 전한다.

머리에 쓰면 갓, 뒤집으면 밥솥

그렇게 한 세상을 떠돌며 토정은 풍류사에 길이 남을 숱한 전설적 일화를 남겼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일화는 ‘쇠갓’을 만들어 쓰고 다닌 일일 것이다. 관례(冠禮) 이후 수십 년간 쓰고 다니던 갓이 망가져버렸는데 선비로서 의관이 없으면 바깥출입을 못하던 당시로서는 큰일이었다.

그런데 낡을 대로 낡아버린 밥솥까지 구멍이 뚫려 더는 못쓰게 되어버렸다. 궁리를 거듭하던 토정은 마침내 기발한 착상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것이 바로 쇠갓이었다.

쇠로 갓을 만들었으니 낡아서 버릴 염려도 없고 뒤집어놓으면 밥솥도 되니 이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닌가.

▲ 아산향교. 아산면 아산리에 있으며, 본래 영인중학교 근처 향교골에 있던 것을 토정이 현감 재직 시 옮긴 것이다.

이런 일화는 토정의 기인다움도 돋보이게 하거니와 그가 얼마나 청빈하게 살았던가를 분명히 반증해준다고 하겠다. 장대한 체격의 사내가 보기에도 괴상한 쇠갓을 쓰고 다니니 그는 이내 서울의 명물로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토정의 부인 전주 이씨는 끼니 때마다 ‘움직이는 밥솥’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을까.

이처럼 토정은 청빈무욕하게 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능하고 무기력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사농공상이라고 하여 상인이 가장 천대받던 시대에 그는 이미 상업과 경제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본보기삼아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떼돈을 번적도 있었다.

언젠가는 조각배를 타고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어서 수만 개의 바가지를 만들어 팔아 수천 석의 곡식을 사서 빈민들을 구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에는 쌀 한 됫박 들여놓지 않으니 부인이 바가지를 긁을 수밖에 없었다.

토정은 풍류거사였을 뿐만 아니라 앞날을 미리 내다볼 줄 안 도통한 예언가이기도 했다. 서산대사·이율곡·이순신과 등과 더불어 토정도 임진왜란을 예측한 몇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또 사람의 안색과 음성만으로도 그의 길흉화복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토정은 또한 풍류객답게 음률에도 정통했고 특히 거문고를 잘 탔는데 그의 둘째아들 산휘(山輝) 역시 지음(知音)의 기재(奇才)였다고 전한다.

율곡이 ‘경연일기’ 선조 11년(1578) 7월조에 이렇게 썼다.

‘아산현감 이지함이 죽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욕심이 없고 인색함을 몰랐다. 기질을 이상하게 타고나 추위·더위·주림·갈증을 잘 참았다. 어떤 때는 알몸으로 거센 바람을 맞았고, 또는 열흘을 음식 한 번 먹지 않아도 병들지 않았다. 천성이 효성과 우애가 깊었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남의 급한 사정을 잘 도왔다. 명령을 내리는 것은 모두 백성을 사랑하기를 위주로 하니 백성 모두가 그를 흠모했으나 갑자기 이질을 앓아 세상을 버렸다. 나이 62세였다.’

1578년 음력 7월 17일 일세의 풍류기재 토정 이지함이 아산현감 자리에서 세상을 뜨자 수많은 고을 백성이 길을 메우고 마치 부모상을 당한 듯 애통해했다.

아산에 동상과 선정비, 보령에 묘

▲ 아산시 영인면은 토정이 현감 재직 시 아산현 관아 소재지였다. 김옥균 묘에서 바라본 것으로, 멀리 여민루와 영인저수지가 보인다.

충남 아산시 영인면은 토정이 아산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아산현 관아 소재지였다.

영인면사무소 앞뜰에는 1997년 12월 23일에 세운 토정 이지함의 동상이 있고, 그 뒤쪽에는 토정의 선정을 기리는 영모비가 있다. 또 영인초등학교 입구에는 토정 당시 아산현 관아 정문이었던 여민루가, 여민루에서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면 토정이 이전한 아산향교가 있다.

하지만 토정이 구세제민의 경륜을 펼치던 걸인청 건물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남아 있었으나 시골까지 불어닥친 개발 바람에 밀려 사라져버려 이제는 영영 찾아볼 길이 없다. 토정의 묘소는 서해의 낙조가 내려다보이는 충남 보령시 주포면 고정리 국수봉 기슭에 있다.

토정 이지함, 그는 참으로 우리 풍류사를 빛낸 비상한 기인이재(奇人異才)였다.




황원갑 소설가·한국풍류사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