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신화와 의학 / 문국진 지음 / 예담 발행 / 1만 6,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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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베스트셀러 ‘성경’이 서 있을 맨 앞자리부터 차례로 훑어가다 보면 아마 그리 오래지 않아 ‘그리스·로마 신화’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정경(正經)을 절대시하는 성경의 경우 어휘나 문장 스타일 같은 세세한 차이를 무시한다면 각 판본의 내용이 똑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리스·로마 신화는 무엇을 원전으로 삼았는가, 누가 편역했는가, 표현수단이 글인가 그림인가 등등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둘 다 인류 최고의 고전이지만 번역자가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성경이라면, 그리스·로마 신화는 편역자의 개성과 역량으로 풍요로움을 더하는 텍스트인 셈이다.

팔순을 넘겼음에도 여전히 왕성한 지성과 필력을 떨치고 있는 법의학자 문국진씨가 펴낸 <그림으로 보는 신화와 의학>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또 다른 변주이다.

제목의 세 키워드를 빌어 이 책의 지향점을 표현하면 ‘그림과 의학으로 맛깔스레 발효시킨 그리스·로마 신화’ 정도가 될 것이다.

인문학(미학)과 자연과학(의학)이라는 지식의 쌍두마차를 능숙하게 몰면서 필자는 신화 읽기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고자 애쓴다. 또 독자에게 말한다. 상상력의 나래를 펴고 신화의 세계에 몰입하면 ‘정신 면역’(감성에 자극된 뇌가 몸에 필요한 항체를 생산하는 작용)을 기를 수 있다고.

필자는 원전에서 발췌한 이야기에 해설을 가미해 5부에 걸쳐 여덟 편씩 담았다. 총 마흔 편에 이르는 토막글마다 저자는 “힘닿는 한…많이 모으려고 노력”한 그림과 조각품 사진을 풍성하게 곁들였다.

넉넉한 도해(圖解) 덕분에 독자는 시각적 포만감을 느끼는 것은 물론, 뭉뚱그려 인식했던 수많은 신화 저마다의 진미와 별미를 재발견하게 된다. 한편 인용된 미술품의 제작 연대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다양한데, 이는 예술가에게 신화가 마르지 않는 작품 영감의 원천임을 방증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저자가 색다른 맛의 신화를 내놓고자 ‘이스트’(효모)로 삼았던 재료는 그림과 의학이다.

과연 두 재료 모두 발효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일까. 절반은 실패한 것 같다. 그림과 조각품 사진은 분명 그 분량이 풍족하고 배치가 적절하지만, 그래서 내용의 이해를 돕고 읽는 즐거움을 더하지만, 이야기 자체와 결합해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그에 반해 신화에 의학을 버무려 내놓은 절반의 성과는 제법 빛난다.

법의학의 관점에서 음악·미술 작가와 작품을 살피는 일련의 작업을 수행해온 필자는 그 경험을 살려 신화의 무변한 세계를 개성있게 요리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원전 격인 <일리아스> <변신 이야기>나 토머스 불핀치 류의 정격 판본을 접한 독자라면 아는 이야기를 ‘낯설게 읽는’ 묘미가 쏠쏠할 듯싶다.

여러 의학 분야 가운데 필자가 신화를 재해석하는 틀로 주로 삼는 것은 병명의 기원이다. 여타 신화집과 비교할 때 특색이 없어 보이는 1, 2부를 지나 3부로 들어서면서부터 노(老)학자의 쌓인 내공이 본격적으로 발휘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기본이고 황피증(산토데르마·트로이의 스카만드로스 강에서 유래), 건망증(앰니지어·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 여성 색정증(님포·여신을 보좌하는 님프), 매독(시필리스·양치기 청년 시필루스), 포도상구균(스타피로코쿠스·목동 스타필로스) 등 현대 의학에서 병명·병원(病原)·증상을 일컫는 단어의 연유를 필자는 신화의 고혹적 풍경 속에서 원숙하게 찾아 낸다.

이 책은 미술사를 다양한 주제로 풀어내며 호평을 얻고 있는 출판사 예담의 ‘명화 속 이야기’ 시리즈 아홉 번째 저작이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