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버블' - 인간 관계의 피폐함과 소외가 부른 극단적 행위와 심적 동요 묘사

내용이나 주제, 스타일 등의 영화적 요소보다 영화 외적 요소로 화제가 되는 영화도 있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실험적인 소품 영화 <버블>이 그런 경우다. 요즘처럼 극장 배급이 영화 흥행을 좌우하는 절대 변수로 작용하는 때, <버블>은 극장과 DVD, 케이블, VOD 등 다채널 개봉이라는 가히 실험적인 시도를 저질렀다.

일견 무모해보이는 이 모험을 모의한 이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에린 브로코비치> <오션스 일레븐> <솔라리스> 등으로 상업영화와 작가영화의 줄타기를 지속해 온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다.

<버블>은 데뷔작으로 받은 과도한 관심이 부담스러웠는지 한때 도태되는 듯 보였던 그의 번뜩이는 재능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수준작이다.

죽은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미국 중서부 작은 마을 파커스버그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버블>은 통상적인 스릴러 장르와는 다르다.

살인 사건을 중심에 놓기보다 평범한 사람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행위에 이르기까지의 고조되는 심적 동요를 영화 전반에 걸쳐 긴장감 있게 묘사한다.

인형 공장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 마샤는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홀로 산다. 그의 유일한 친구는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청년 카일. 카일 또한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마샤는 카일에게 동병상련과 희미한 이성적 감정을 느끼지만 공장에 젊은 미혼모 로즈가 들어오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카일은 첫눈에 로즈에게 호감을 느끼고, 마샤는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낀다. 마샤의 신경증이 도를 더해가면서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버블>에서 주인공들만큼이나 인상적인 것은 마을의 풍경이다. 거의 대부분의 주민들이 노인인 이 마을은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반쯤 죽은 공간처럼 보인다.

주인공들이 근무하는 공장은 수작업 위주의 낡고 영세한 곳이다. 잘려진 인형의 신체들을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카메라는 종종 무표정한 사람들의 얼굴과 인형의 얼굴을 동일시한다.

미동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보는 마샤와 마샤의 아버지, 소파에 붙박이 인형처럼 앉아있는 카일의 어머니, 교회 예배 시간에 밀랍 인형처럼 앉아있는 마을 주민들은 살아있으되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인 삶을 살고 있다.

마샤 역시 이 퇴락한 공동체의 구성원이지만 그 장력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해변으로의 휴가 계획을 카일에게 이야기하는 순간만큼 그녀는 활기차 보인다. 마샤가 카일에게 갖는 애정 또한 그러한 희망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하게 마샤를 몰아붙인다. 소통과 애정을 갈망하는 희망은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그녀의 삶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영화는 중년 여성노동자 마샤와 대인공포증에 시달리는 청년 카일, 젊은 미혼모 로즈의 캐릭터가 보여주는 최하층 노동자의 삶이 얼마나 고립적인가를 보여준다. 자본주의의 빠른 순환에서 도태된 이들은 마치 공장에서 생산되는 싸구려 인형처럼 변화 없는 죽은 삶을 영위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는 것이다.

<버블>은 미국적 삶에 널리 퍼져있는 인간 관계의 피폐함과 냉랭한 분위기를 절제된 스타일로 따라잡는다.

음울하고 축축한 마을 분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조차 그 거대한 죽음의 공기를 정화시키지 못한다. 마샤는 카일과, 카일은 로즈와 소통하기 원하지만 카일은 마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로즈는 또한 어떤가? 그녀는 오로지 카일이 벽장 속에 숨겨둔 돈을 훔치기 위해 그와 데이트한다. 가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관심이나 애정이 아니라 부동성과 침묵이라는 사실을 <버블>은 한 중년 여성의 숨막히는 침묵을 통해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인형의 잘려진 신체들은 이러한 무기력한 노동자들의 삶을 섬뜩한 방식으로 비유한다. 흡사 생명력 없는 인형들로 이루어진 인형의 마을과도 같은 파커스버그는 자본주의의 무덤이자, 미국 소도시의 현재이기도 하다.

천재 감독의 혈기방장한 실험정신

이 영화에서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생생한 감정은 우연이 아니다.

소더버그 감독은 영화의 무대가 되는 지방에서 극중 캐릭터와 유사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비직업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최대한 그들의 삶과 가깝게 시나리오를 고쳤고 그들이 실제로 사는 집에서 촬영을 했으며, 대사 또한 그들의 실제 삶과 비슷한 에피소드들로 조정됐다.

소더버그는 아카데미가 혹할 만한 영화를 만들다가도 전위적인 실험영화로 노선을 바꾸는 감독이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레드 카펫 퍼레이드를 보는 듯한 <오션스 일레븐>의 호화 캐스팅과 <버블>의 비직업 배우 캐스팅을 오가는 그는 자신의 뿌리인 저예산 독립영화의 도전정신을 잃지 않았다.

<버블>은 여덟 편의 HD 영화를 통해 이제껏 보여지지 않았던 미국의 단면을 퀼트처럼 짜깁기해 보여주겠다는 소더버그의 야심찬 프로젝트의 출발점이다. 할리우드 제작자, 감독들이 “미친 짓”이라고 일갈한 극장, DVD, 텔레비전 동시 개봉도 순전히 소더버그의 아이디어였다.

극장주들과 스크린의 아우라를 절대시하는 일부 감독들의 원성을 산 이러한 시도의 성패를 현재로서는 쉽사리 따질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메이저 영화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불리한 마이너한 영화들의 상영 통로에 대한 고민의 결과라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큰 영화들 가운데 작은 영화가 살아 남기 위해서 최대한 많은 관객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윈도우를 다양화하겠다는 배급 방식은 다른 한편으로 영화에 대한 자신감으로 보인다. <버블>은 그런 자신감에 값할 만한 영화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