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용 감독 철없는 엄마, 파란만장한 동생, 그리고 티격태격 연인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내다버리고 싶은 것.”

일본 최고의 코미디언이자 영화감독인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내치자니 남들의 눈이 무섭고, 끌어안고 함께 가자니 감내해야 할 짐들이 너무 많은 애물단지. 기타노에게 가족은 그런 의미였던 셈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사회를 이루는 최소 단위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특별한 공동체다.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대부분의 갈등이 싹트는 단위이고 그 갈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김태용 감독의 두 번째 영화 <가족의 탄생>은 가족이라는 인연이 주는 고통과 외로움, 그리고 위안을 함께 전해준다.

민규동 감독(<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과 공동 연출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로 데뷔한 그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이야기를 긴밀하게 이어 붙여 기상천외한 상처투성이 가족에 대한 잘 짜여진 퀼트를 완성했다.

이상한 나라의 가족 이야기

첫 번째 에피소드. 분식집을 하며 혼자 사는 노처녀 미라(문소리)의 집에 5년 동안 감감무소식이었던 남동생 형철(엄태웅)이 20년 연상의 아내 무신(고두심)과 함께 돌아온다. 어색하기만 하던 세 사람이 서로에게 익숙해질 무렵, 무신이 전 남편과 낳은 딸 채연이 찾아오면서 분위기는 썰렁해진다.

두 번째 에피소드. 고궁 안내원 선경(공효진)은 여러 남자를 전전하는 엄마 매자(김혜옥)와 따로 살면서 외국으로 나갈 궁리에 빠져있다. 그러나 매자가 불치병에 걸리자 선경의 마음은 흔들린다. 게다가 매자에게는 동거남과 사이에서 난 아들 경석이 있다.

세 번째 에피소드. 경석(봉태규)과 채연(정유미)은 연인 사이. 매사에 남들에게 지나치게 헌신적인 채연의 성격 때문에 경석은 외롭고 상처 받는다. 헤어지자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헤어질 수 없는 그들은 티격태격하다 지방에 있는 채연의 집까지 온다. 그리고 뜻밖의 일이 일어난다.

<가족의 탄생>은 흔히 볼 수 없는 기이한 형태의 가족으로부터 보편적인 한국 가족의 정서를 이끌어내는 신기한 영화다.

철부지 청년과 중년 아줌마 부부, 유부남과 동거하는 엄마를 둔 소녀, 박애주의적 여자친구를 둔 청년의 고민 등 기이한 상황에서 맺어진 가족들이지만 그들이 갈등하고 화해하는 방식은 일반적인 가족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심지어 <가족의 탄생>은 가족이라는 혈연공동체를 ‘타인’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한다.

형철과 무신의 에피소드에서 떠나버린 형철 대신 가족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은 굳이 말하자면 생판 ‘남’들이다. 남동생이 버린 아내와 시누이, 그리고 아내와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전 남편의 딸로 이루어진 ‘이상한’ 가족의 탄생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분리돼 있는 세 개의 에피소드를 연결시키는 방식은 이 같은 드라마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한다.

초반에 대칭적으로 진행되던 에피소드들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하나로 합쳐지는 방식은 구성의 묘를 느끼게 할뿐 아니라 영화 속 모든 비밀을 풀어준다. <가족의 탄생>은 진정한 가족이 되기 위해 험난하고 먼 여행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김태용 감독은 첫 번째 에피소드와 두 번째 에피소드가 만나는 지점과 세 번째 에피소드(채연과 경석의 에피소드)를 연결시키는 극적 구성을 통해 타인에 대한 연민과 이해가 새로운 가족 탄생의 근간임을 암시하고 있다.

새로운 가족공동체의 탄생

느슨한 듯 꽉 짜여진 구성 외에도 이 영화의 장점은 널려 있다.

인공 조명과 스튜디오 촬영을 배제한 자연광 촬영, 생생한 로케이션, 거기서 비롯된 섬세한 장면 연출은 영화의 품격을 한 계단 올려 놓았다. 고두심과 문소리, 그리고 발군의 기량을 보여준 엄태웅의 연기가 돋보이는 것은 드라마의 흐름에 적절히 포커스를 맞출 줄 아는 조용규 촬영감독의 감각 덕분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4인용 식탁>에서 확인된 바 있는 감정을 조율하는 그의 카메라는 <가족의 탄생>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제대로 해준 것 없는 딸의 악다구니 앞에서 속수무책 입을 다물어야 하는 철부지 엄마 매자의 고집스런 턱, 헤어지려는 남녀가 참았던 감정을 토해내는 순간, 아파트 복도의 어둠에서 묻어나는 스산한 감정의 뉘앙스는 온전히 촬영의 몫이다.

정서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현실적인 이러한 빛나는 이미지는 영화가 드러내는 바, 일견 해괴해보이는 인간관계에 담긴 진심을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된다.

<가족의 탄생>은 가족이 혈통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뭉친 공동체라고 주장한다.

세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 경석은 애인인 자신보다 타인에게 더욱 살가운 채연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채연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경석은 그녀의 기이한 언행의 실체를 이해한다. 채연을 돌봐준 두 명의 엄마, 사실은 두 명의 타인이 베풀어준 사랑은 채연으로 하여금 가까운 사람에 대한 사랑 못지 않게 중요한 ‘타인에 대한 연민’을 몸으로 체득하게 한 것이다.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러나 어찌 보면 있을 법한 가족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영화의 초반부는 의외로 지극히 현실적인 아픔을 전달한다. 그러나 영화는 결국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축복하는 판타지의 기쁨으로 끝을 맺는다.

충분히 사랑스러운 결말이지만, 뒤틀린 관계에서 오는 아픔을 절절하게 보여주던 초반부를 생각하면 생생한 현실을 단번에 지워버리는 지나치게 ‘착한’ 결말이기도 하다.

결국 <가족의 탄생>이 설파하는 진정한 가족의 탄생은 혈연이나 서약이 아니라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의 연대에 의해 성립되는 셈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