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의 향기 송강 정철 (下)

‘관동별곡’은 강원감사가 되어 원주감영에 부임한 뒤 금강산과 관동팔경 등을 속속들이 돌아보고 산수와 고사, 풍속과 인정 등을 읊은 송강가사 중 가장 긴 작품이다. ‘관동별곡’은 선경을 소요하는 풍류가객 송강의 면모가 전편을 관통하는 듯한데, 특히 해금강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대목은 압권이다.

-명사(鳴沙)길 니근 말이 취선(醉仙)을 비끼 실어
바다랄 곁에 두고 해당화로 들어가니
백구야 나디마라 네 벗인지 어찌 아난....-

또한 금강산 구룡폭포를 묘사한 대목을 보자. 우리말을 마치 마술처럼 자유자재로 다룬 그의 솜씨야말로 참으로 신기절묘의 극치라 할 수밖에 없다.

-은하수 한 굽이를 촌촌히 베어내어
실같이 풀쳐서 베같이 걸었으니....-

4년 뒤에 송강은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은 멈출 줄을 몰랐다. 심지어는 술 때문에 실수한 일까지 트집을 잡았고, ‘성격이 편협하며 감정에 치우쳐 매사를 그르치는 인물’이라면서 조정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참소했다.

그때마다 선조는 송강을 두둔하며, “정철이 술 좋아하는 것은 나도 잘 알지만, 술 마시는 것까지 시비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했고, “정철은 곧은 사람이다. 단지 바른말을 잘해 미움을 살 뿐이다”고 편들었다.

그리고 아끼던 말까지 하사해 타고 다니게 하니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총마어사(寵馬御使)’라고 불렀다.

정치적 좌절기가 문학적 전성기

선조 18년에 율곡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 송강도 조정을 물러나 고양을 거쳐 담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후 4년간 전원에 은둔,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기고 시짓기에만 전념했다.

50세부터 54세까지 이 시기가 송강에게는 정치적 좌절기였으나 문학적으로는 전성기였다. 온갖 세파에 부대끼면서 시인으로서도 원숙한 경지에 들어서서 ‘사미인곡’,‘속사미인곡’ 같은 가사문학의 정수와 수많은 단가를 이때에 지었다.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산1번지의 전남지방기념물 제1호 송강정과 남면 지곡리 산 75번지의 식영정은 송강 가사문학의 산실이다.

송강정은 본래 죽록정을 송강이 고치고 이름을 바꾸어 머물던 곳인데 그 옆에 ‘사미인곡’전문을 새긴 송강시비가 서 있다. 1955년에 세워진 이 시비는 송강의 문학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몸 삼기실제 님을 좇아 삼기시니
한생연분이며 하날 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점어 잇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줄데 노여없다....-

이렇게 시작되는 ‘사미인곡’은 송강 자신을 한 여자의 몸으로, 임금을 님으로 비유하여 가까이서 모시지 못하고 연모하는 심정을 독백체로 읊었다.

그리하여 그리운 님 때문에 병이 생겼으니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가 되어서라도 님을 따르고 싶다며 끝맺는다. 한편, ‘속사미인곡’은 두 여인을 등장시켜 극적인 대화체로 구성하여 한층 애절한 사모의 정을 그려낸 송강가사의 정수이다.

-저 가는 저 각시 본듯도 하여이다
천상 백옥경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해 다져 저문 날에 누굴 보러 가시는고.....-

이렇게 시작하여 지는 달이 되어 잠시 님의 창 밖에 가서 비치는 것보다 궂은비나 되어 님에게 구슬프게 오래도록 울어보라며 끝맺는다.

四仙의 풍류 서린 식영정과 송강정

식영정에도 1971년에 세운 ‘성산별곡’시비가 있다. 이 식영정은 본래 김성원이 장인인 임억령에게 지어준 정자였다. 여기에 당시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 이른바 ‘식영정 사선(息影亭四仙)’이 어울려 술과 시와 거문고와 노래로 풍류를 즐겼다.

-어떤 지날 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생 세간에 좋은 일 많건만은
어찌 한세상을 갈수록 낮게 여겨
적막산중에 들고 아니 나시는고...-

이렇게 시작되는 ‘성산별곡’은 식영정과 서하당 주변 사계절의 변화하는 정취를 묘사하고, 마지막으로 뜬구름같이 변화무상한 세상에 술 마시고 거문고 뜯으니 신선이 부럽지 않노라는 뜻의 내용이다.

식영정은 광주호 건너 장원봉을 등지고 야트막한 별뫼 언덕 끝에 자리잡고 있다. 정자 앞으로 광주호 상류 창계천이 흐르고 개울을 건너면 송강이 김성원, 고경명 등과 더불어 10년간 공부하던 환벽당이 나온다.

선조 22년(1589) 8월에 맏아들 기명(起溟)이 27세 한창나이로 죽었다. 송강은 부인 유 씨와의 사이에서 기명, 종명(宗溟), 진명(振溟), 홍명(弘溟) 네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가 54세의 아비를 두고 먼저 죽은 것이다.

담양에서 올라와 아들을 고양 원당에 묻고 머무는 사이에 정여립사건(鄭汝立事件)이 일어났다. 송강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궐로 들어가 임금을 위로하니 선조는 그의 충성심이 가상타며 그해 11월에 우의정으로 등용했다.

이때 수많은 연루자가 정철의 손에 죽어 그는 두고두고 모진 사람 소리를 들으며 유족과 자손들로부터 저주를 받아야만 했다.

▲ 송강 정철의 필적. 둘째아들 종명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그 이듬해에는 좌의정에 올랐지만 적자가 없는 선조의 세자 세우는 이른바 건저사건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다시 파직되어 함경도 명천으로, 경상도 진주로, 함경도 강계로 남북 수만리를 오르내리며 귀양살이를 했다.

그렇게 2년간 모진 세월을 보내는 동안 송강도 어느새 57세의, 당시로서는 노인이 되어버렸다.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무인지경을 가듯 서울로 북상하자 멍청한 당파싸움으로 헛세월을 보내던 임금과 대신들은 백성을 버리고 몰래 피란길을 떠났다.

그 무렵에 풀려난 송강은 강계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평양에서 임금을 만나 박천, 가산으로 호종했다.

그해 9월에 전라도체찰사로 임명되었으나 서울이 함락당한 판국에 어쩔 수 없이 강화도에서 형세를 살피다가 다시 소환되어 의주로 돌아갔다. 이듬해 5월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황달병에 걸려 귀국했다.

전황은 소강상태였지만 조정은 동인에서 갈라진 남인, 북인 간의 반목으로 당쟁이 끊임없었다. 그 와중에 또 다시 모함을 당해 송강은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강화도에 칩거했다.

늙고 병든 데다가 패기조차 사라진 송강은 만사가 귀찮았다. 그저 피곤한 심신을 눕히고 쉬고만 싶었다. 그렇게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던 일세의 풍류가객 송강 정철은 선조 26년(1593) 12월 18일에 파란만장하고 중첩했던 이승살이의 막을 내리니 그때 58세였다.

그의 묘는 처음에는 부모와 장남이 묻힌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송강마을에 썼지만 현종 6년(1665)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권유로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동 환희산 기슭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묘소 앞의 사당 송강사는 충북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잇다.

송강사에서 묘소로 올라가는 야트막한 야산 기슭에는 ‘사미인곡’일부를 새긴 시비가 서 있어 일세의 풍운아 송강 정철의 위대한 풍류정신과 문학정신을 새삼 되새기게 해준다.

-인생은 유한한데 시름은 그지없다
무심한 세월은 물흐르듯 하는고야
염냥이 때를 알아 가는 듯 고쳐오니
듯거니 보거니 늣길 일도 하도할샤…-



황원갑 소설가·한국풍류사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