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미즈 다카시 감독 '환생'

흑단 같은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TV 수상기 안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원귀 사다코의 이미지가 이 나라를 휩쓸었던 적이 있었다.

소름끼치는 공포 때문에 무서움을 잊기 위해 패러디 시리즈가 등장했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나카다 히데오 감독의 <링>에 나오는 그 시원적 이미지 이후, 일본 공포영화의 영향력은 한국뿐 아니라 할리우드에서도 입증된 바 있다.

<링>이 고어 버번스키(<멕시칸>, <캐리비언의 해적>)에 의해 리메이크돼 짭짤한 흥행 수익을 올렸을 뿐 아니라, 시미즈 다카시의 <주온>은 시미즈 감독이 손수 리메이크판 <그루지>를 연출했다.

일본에서는 이 같은 일본 공포영화의 성공을 업그레이드시켜보자는 취지로 공포영화 전문 제작사도 등장했다. <링>, <주온>의 프로듀서 다카시게 이치게가 설립한 공포영화 전문 제작사 ‘제이 호러 씨어터’는 나카다 히데오, <큐어>의 구로사와 기요시 등 재능 있는 공포영화 감독들을 자원으로 판로 개척에 나섰다.

현재 오치아이 마사유키 감독의 <감염>과 츠루다 노리오 감독의 <예언>이 완성된 상태다. <주온>의 히트메이커 시미즈 다카시가 연출한 <환생>은 ‘제이 호러 씨어터’의 세 번째 작품이며, 이 회사 작품으로 국내에 최초로 개봉되는 영화이다.

동·서양 공포의 크로스오버

풋내기 여배우 스기우라 나기사(유카)는 마츠무라(시이나 깃페이) 감독의 영화 <기억> 오디션에서 단번에 주역으로 발탁된다.

기쁨에 들떠 시나리오를 읽던 도중 스기우라는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 극중 어린 여자아이의 형상과 기괴한 人형이 끊임없이 자신의 주위를 맴돌자 불길함을 느끼면서도 다시 없는 기회라는 매니저의 설득에 출연을 강행한다.

1970년 한 호텔에서 가족을 모두 죽이고 호텔의 종업원과 손님 등 11명을 살해하고 자살한 오모리 교수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기억>에서 스기우라가 맡은 배역은 맨 마지막에 살해당하는 오모리 교수의 어린 딸. 현장에서 리허설을 하던 중 그녀는 스틸 사진을 찍을 때마다 실제 살해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는 기현상에 시달린다.

한편 평범한 여대생 기노시타 야유이는 어릴 적부터 빨간 색 지붕의 건물이 등장하는 꿈을 꾸고 전생에 관해 의문을 갖는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전생을 믿는다는 배우지망생 유카를 소개시켜주고, 유카는 자신이 70년 호텔 살인사건의 희생자 중 한 명의 환생이라고 주장한다.

<환생>은 미스터리 공포영화의 공식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일본 공포영화 특유의 귀기서린 분위기를 조성한다.

<주온>에서 등장하는 ‘귀신 들린 집’이라는 모티브는 이 영화에서도 여전하지만, ‘환생’이라는 설정을 둘러싼 드라마 장치는 <주온>보다 탄탄한 편이다. 보일락말락 스쳐 지나가는 괴형체들이나, 주인공 주변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 등 깜짝 효과보다는 뒷덜미를 서늘하게 만드는 상상적인 공포로 분위기를 끌어간다.

이미 자신의 영화 <주온>의 할리우드 리메이크판 <그루지>를 연출해본 경험이 있는 시미즈 다카시 감독은 <환생>에서 동서양 공포 영화의 모티브들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드라마틱한 반전이라든가 미스터리 구조, 캐릭터 묘사에 있어서 서구 공포 영화의 관습을 따라가는 듯하면서도, 보여지는 이미지나 사운드에 있어서는 다소 모호하고 그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동양적인 공포에 집중하는 것이다.

영화와 현실의 교차를 통한 은유

<환생>은 단순히 영화 속 영화라는 소재뿐 아니라 영화에 관한 은유를 곳곳에 심어놓았다.

‘가족 살해’라는 모티브는 <주온>에서 부터 이어진 것이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음산하고 고풍스러운 서양식 호텔, 호텔에서 미쳐서 살인마로 돌변한 가장의 모티브는 저 유명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밀실 공포영화 <샤이닝>을 떠올리게 만든다.

살인마 오모리 교수가 지나치게 환생에 관한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사람이 죽어가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다는 설정은 영화보기의 가장 근본적인 쾌락인 관음증에 대한 매우 공격적인 은유이다. 또한 살인자의 손에서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카메라 촬영 소음은 원혼의 발자국 소리처럼 찜찜하고 음산한 사운드 효과를 십분 발휘한다.

영화 후반부,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 또한 교수의 카메라에 찍힌 필름을 스기우라의 매니저가 우연히 본다는 설정과 맞물려 있다.

영화 속 영화인 <기억>이 재현해내는 사건의 전모와 현실에서 되풀이되는 환생의 비극, 그리고 교수의 카메라가 재현하는 과거 살해장면이 교차돼 보여짐으로써 <환생>은 살인의 이미지를 다층적으로 겹치게 하면서 공포를 배가시키고 있다.

다소 복잡해 보이는 이런 공포 전략은 실은 매우 효과적으로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살인 사건과 그 살인 사건을 재현하는 영화, 그리고 살인 사건이 담긴 필름이라는 세 가지 소재는 영화의 필수 요건인 현실, 찍혀진 필름, 그리고 관객을 의미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알프레드 히치콕의 <싸이코>를 슬쩍 차용하면서, 시미즈 다카시는 이 영화가 자신의 영화광적 자의식을 담은 작품임을 분명히 한다.

건강하고 밝은 이미지로 인기 정상을 달리는 여배우 유카를 어둠의 핵심인 스기우라 역으로 캐스팅하고, 구로사와 기요시가 카메오 출연을 통해 동료애를 과시한 <환생>은 일본 관객들뿐만 아니라 세계의 관객들을 다분히 의식하는 ‘제이 호러 씨어터’의 야심을 보여준다.

‘공포영화 전문 제작사’라는 특별한 자기 정체성은 장르의 독창적 진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추진력이 된 듯하다. 이처럼 작지만 옹골찬 한 우물파기가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를 지켜보는 것은 정녕 흥미로운 일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