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자본주의의 최첨단을 질주하는 미국. 그러나 은행 규모나 수익률은 세계 최고일지 몰라도 이용의 편리성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미국에 와서 내가 겪은 황당한 일을 알게 되면 아마도 그 말에 동의할 것이다. 사건의 자초지종은 이렇다.

미국에 온 초창기, 나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 Automatic Teller Machine)에 돈을 입금할 때 한국과 미국의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몰랐다.

한국에서처럼 ATM에 입금하려고 Bank of America ATM이 설치되어 있는 곳에 갔다. 근데 이게 웬일, Bank of America의 ATM만 그런 건지 한국어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사막에서 한국인을 만난 양 무척 반가웠다. 한국의 위상이 이 정도로 높아졌구나 하는 자긍심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서비스 정신은 역시 대단해’ 하며 내심 감탄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내가 방심했는지도 모른다.

입금 표시를 누르니 입금할 돈을 먼저 누르라고 했다. 그래서 20달러를 입금한답시고 20달러를 눌렀다. 그랬더니 ATM이 입을 확 열었다. 돈 달라고. 난 별 생각 없이 입 안에 돈을 재바르게 넣었다.

ATM는 돈을 날름 삼키더니 입을 닫고 영수증을 쓰윽~ 내뱉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달랑2달러가 입금된 것이었다.

아뿔싸, 내가 실수로 20달러가 아닌 2달러 입금 표시를 누른 것이었다. 한국에서라면 잘못 입금됐다고 돈을 토해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미국의 기계는 무심하게 돈을 먹고 2달러가 표시된 영수증을 내준 후 입을 싹 닦아버리다니···. 이런 멍청한 기계를 봤나 생각했다.

일단 나의 실수를 깨닫고 곧바로 은행에 전화를 걸기 위해 전화부스를 찾아나섰다. 얼마 뒤 전화부스를 발견하고 카드를 꺼내려는 순간 ‘아차차’ ATM에서 카드를 뽑지 않은 게 기억났다. 당황하다보니 깜빡한 것이었다.

다시 원래 장소로 헐레벌떡 원위치. 이런 또 황당한 일이…. 카드가 사라지고 없었다. 짧은 시간에 누가 카드를 빼갔나 하고 주위를 살폈더니 이번엔 봉투 같은 것이 보였다.

‘이건 또 뭐야’ 하는 순간, 이것은 입금할 때 돈을 담아서 ATM에 넣으라고 준비해둔 것이라는 설명이 봉투에 적혀 있었다. 황당 또 황당.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입금할 때 봉투에 돈을 넣어야 하고 금액이 틀리더라도 ATM이 그냥 받아먹는 시스템이라는 것.

(입금을 하면 다음날 은행원이 봉투를 꺼내 확인한 후 손으로 다시 입금한다는 것. 결과적으로 하루 늦게 통장에 돈이 들어가는 셈이다. 단, 오후 2시 이전에 현금(cash)으로 넣으면 당일 입금 처리된다고 한다.)

아무튼 얼른 다시 바람처럼 전화부스로 달려갔다. ‘미국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달. 내게 이런 시련이 올 줄이야. 간신히 영어에 입을 뗐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무척 고민했다. 하지만 궁즉통(窮則通)이라, 궁하면 통하는 법. 최대한 아는 단어를 모두 동원하고 조합해서 전화를 걸었다.

먼저 돈을 입금할 때 금액을 잘못 눌렀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상담원이 뭐라뭐라 하더니 나중에는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아 “no problem?” 이라고 재차 확인했더니 문제없다고 말했다. 다시 ‘in addition to’ 를 붙여서 얘기했다. 돈을 봉투에 넣지 못했다고.

그랬더니 상담원이 다시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뭐라 얘기하더니 그러면 영수증을 가지고 내일 은행으로 와보라고 말했다. 2단계 관문 통과. 마지막으로, 나는 “카드를 잃어버렸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담원은 이건 또 뭐야 하는 말투로 은행에 꼭 가보라고 당부했다.

전화를 끊고 기숙사에 돌아와 한국인 친구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자기도 미국의 ATM이 그런 줄은 몰랐다고 했다. 아마 카드는 ATM이 먹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카드를 계속 안 뽑고 있으면 ATM이 그것까지 먹는다나.

미국이 세계의 자본을 먹어치우듯이 ATM도 주인을 닮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ATM은 돈이든 카드든 뭐든 먹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다음날 은행에 가서 또 한 번 황당 스토리를 리바이벌하고 짧은 영어 실력을 모두 동원해 그래도 무사히 오류를 시정할 수 있었다. 임시 카드(temporary card)를 받고 그리고 나머지 18달러는 추가로 입금됐으니 내일 확인해보라는 말도 들었다.

돈에 배고픈 미국의 ATM. 미국에 처음 온 외국인들은 ATM이 입금되는 돈도, 봉투도, 심지어 고객이 잊고 꼽아둔 카드까지 먹는다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국인 자신이 배곯는다.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나는 한국 금융기관들의 고객서비스가 비만한(?) 미국의 은행 시스템보다 훨씬 편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 밑바탕엔 한국의 우수한 IT기술과 고객우선 마인드가 있지 않을까 싶다.

김성은 통신원 (미국 보스턴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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