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 감독 '비열한 거리' - 자본주의의 냉혹한 벽에 부딪힌 청년, 비뚤어진 욕망으로 파열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유신 시대의 폭압적인 공기를 불우했던 고교시절의 기억 속에 대입했던 유하 감독이 이번에는 동정 없는 ‘폭력’이 만연한 거리로 나왔다. 시인 출신 감독 유하의 네 번째 영화 <비열한 거리>는 <말죽거리 잔혹사>에 이은, 이른바 유하의 거리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외관상 <말죽거리 잔혹사>와 직접적 연관성은 없지만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거리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한 청년이 자본주의와 비루한 욕망으로 인해 스스로 파멸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조폭으로 살아간다는 것

작은 조직의 2인자 병두(조인성)는 병든 어머니와 두 동생을 보살피고 조직을 건사하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상황이 녹록치 않다. 집은 철거촌에서 내몰리고, 자신에게 주어졌던 오락실 경영권도 동료에게 넘어가자 병두는 다급해진다.

중간 보스 상철(윤제문)의 스폰서인 황 회장(천호진)은 자신을 괴롭히는 부장 검사를 없애주면 스폰서가 돼 주겠다는 약조를 한다. 고민하던 병두는 검사를 제거하지만, 이를 눈치챈 상철이 병두를 없애려 한다.

상철 마저 살해한 병두는 황 회장을 배경 삼아 경제적 부담을 덜고, 초등학교 시절 첫사랑 현주(이보영)와 장밋빛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조폭영화를 준비한다며 다가온 초등학교 동창이자 감독지망생 민호(남궁민)에게 우연히 살인을 고백하게 되면서, 일은 꼬이기 시작한다.

<비열한 거리>의 이야기는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

아무도 돌봐줄 이 없는 비정한 세상에서 폼 나게 자신의 방식으로 출세하려다 비극적 최후를 맞는 젊은이의 이야기는 숱한 한국영화의 소재였다. 언뜻 떠올려봐도 <게임의 규칙> <초록물고기> <비트> <사생결단> 등이 있다.

적어도 한국 관객들에게 닳고 닳은 이 같은 소재를 요리하는 유하의 솜씨에는 그다지 새로운 구석이 없다. 두 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 동안 드라마는 거의 나열식 에피소드들의 연쇄로 이어진다. 때로 극적 상황들이 순환하지만, 그 순환은 이야기에 깊이를 더해주는 차원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한다.

생존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병두의 인생유전은 그 정점에서 어이없이 무너져내린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이 지극히 상투적이라는 사실. <비열한 거리>는 현실과 공명하는 리얼한 소재를 택했지만 장르의 덫에 교묘하게 잠식당한 이야기가 돼 버렸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세상에 대한 날선 의식이나 현실감 있는 묘사는 종적을 감추고 멜랑콜리한 갱스터 누아르에 대한 향수가 영화를 에워싸는 것이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이 영화의 정서적 지향점은 세르지오 레오네의 회고적 갱스터 무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장성해 재회한 불알친구, 유년기의 첫사랑에 대한 판타지적인 동경, 불우한 가정, 친구의 배신과 파국 등 드라마의 뼈대 뿐 아니라 스스로를 반추하며 회한에 빠지는 캐릭터의 정서 또한 그러하다.

리얼리즘과 누아르 장르의 멜랑콜리한 정감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비열한 거리>는 <말죽거리 잔혹사>가 지닌 경험의 진정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겉돈다.

전형을 극복하지 못한 현실 묘사

모든 상황들이 전형적으로 흘러가는 와중에서 독특하게 느껴지는 것은 극중 영화감독 민호의 존재이다.

초반부에 내레이터 혹은 관찰자의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민호는 병두의 쇠락을 야기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중반부까지 병두의 인생 바깥에 놓여져 있는 것으로 보였던 그는 후반부 갑자기 갈등의 최고 지점에서 이야기의 중심으로 도약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성장’이라는 테마를 근간으로 조폭영화의 바이블 격이 된 곽경택 감독의 <친구>를 교묘하게 변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친구>에서 두 친구의 비극적인 최후를 바라보고 그 전달자가 됨으로써 관객들을 안전한 구경꾼의 위치에 놓았던 상택(서태화)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 민호다. 민호는 조폭 집단과 거리가 먼 영화감독이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그 커뮤니티의 중심으로 진입한다.

<친구>가 교묘하게 조폭 사회와 평범한 바깥 세계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그어놓았다면 <비열한 거리>는 고의적으로 그 울타리를 허물고 ‘폭력’을 우리의 일상 속으로 끌고 오려 한다.

<친구>에서 조직 간의 갈등이 친구 사이의 칼부림을 부른 것처럼 <비열한 거리>에서 병두는 결국 친구의 밀고 때문에 조직으로부터 버림받는다.

민호가 병두의 몰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지만, 민호가 아니었더라도 병두의 몰락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다. 이처럼 예상 가능한 상투적 이야기 구조는 이 영화의 최대 약점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에 이어 이런 영화를 만든 유하의 의도는 확실하다. 마초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잔인한 폭력성이 한국 사회 전반에 암약하고 있음을 학교와 조폭이라는 공동체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이다.

적어도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그런 의도는 충분히 수용된 듯하다. 그러나 윤제문, 천호진 등 조연들의 주목할만한 연기와 부자집 막내 아들 이미지에 머물러 있던 조인성의 헌신적인 변신 노력에도 불구하고 장르적 전형성으로 인해 <비열한 거리>는 애초의 의도를 성취하지 못한다.

순간의 리얼리티는 있으나 그것을 바깥으로 확장하는 데는 실패한다. 조폭들의 패싸움은 생생하지만 병든 어머니, 지켜줘야만 하는 순수한 동생들, 그리고 순수의 표상으로서 여성과의 로맨스라는 장르의 전형성으로 인해 영화는 긴장감을 잃어버렸다.

결국 <비열한 거리>는 장르의 쾌감에도, 리얼한 세계 묘사의 쾌감에도 닿지 못하는 어정쩡한 누아르 영화가 돼 버렸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