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오리지널 <슈퍼맨>이 개봉했을 때, 미국인들은 인간적이면서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국가적인 초영웅을 얻었다.

‘지구를 지키라!’는 단순 명료한 임무를 띠고 우주에서 지구로 보내진 이 초인간은 베트남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미국인들의 상심을 위로해 줄 만큼 강하고, 정의로웠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다시 슈퍼맨이 돌아왔다. 시대상황은 오리지널이 나온 70년대 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엑스맨> 시리즈의 브라이언 싱어가 메가폰을 쥐고, 이미 고인이 된 크리스토퍼 리브 대신 신예 브랜든 라우스가 새로운 슈퍼맨 역할을 맡은 <슈퍼맨 리턴즈>는 리처드 도너가 연출한 <슈퍼맨> 1,2편의 이후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설 곳 잃은 슈퍼맨의 비애

<슈펴맨2>가 나온 시점으로부터 5년 뒤, 슈퍼맨(브랜든 라우스)은 자신의 고향 클립톤 행성이 파괴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우주로 여행을 떠났지만 처참한 잔해만을 확인하고 지구로 돌아온다.

그가 없는 5년 동안, 지구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클라크 켄트로서의 그의 삶은 엄청나게 바뀌어 있었다.

슈퍼맨의 비밀스런 연인이었던 로이스 레인(케이트 보스워스)은 데일리 플래닛 신문사 편집장의 조카 리처드(제임스 마스덴)와 동거 중이며, 다섯 살 난 아들까지 두고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그녀는 ‘세상이 더 이상 슈퍼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퓰리처 상까지 받았으니 기가 찰 노릇 아닌가. 돌아온 슈퍼맨이자 클라크 켄트는 이러한 변화에 고독감을 느낀다.

한편 증거불충분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악당 렉스 루터(케빈 스페이시)는 슈퍼맨의 힘의 원천인 수정을 훔쳐 그 힘을 이용해 미 대륙 전체를 파괴할 음모를 꾸미는 한편 클립토나이트로 슈퍼맨을 무력화시킬 태세를 갖춘다.

<슈퍼맨 리턴즈>는 오리지널 <슈퍼맨>의 이미지를 상당부분 차용하고 있다. 영화 속 미국은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80년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조연 배우들 또한 세월의 흐름을 비껴가기라도 한 듯 변치 않은 모습으로 돌아온 슈퍼맨을 맞이한다.

사진 기자 지미와 데일리 플래닛 편집장, 슈퍼맨의 양어머니 마사 등은 영화 내에서는 5년의 공백, 그리고 영화 바깥에서는 30여 년의 공백을 훌쩍 뛰어넘는다. 이 변하지 않은 세계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겪은 이는 슈퍼맨의 연인인 로이스 레인과 악당 렉스 루터이다.

레인은 말 한마디 없이 떠나버린 슈퍼맨을 원망하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고, 어린 아들과 다정한 약혼자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리고 악당 렉스 루터는 <슈퍼맨>에서 보여준 기회주의자의 모습에 더해, 막강한 힘과 잔인성, 영리함을 두루 갖춘 만만찮은 악당으로 재탄생했다.

그래도 세상에는 슈퍼맨이 필요해

브라이언 싱어가 자신의 이름을 건 프랜차이즈 시리즈 <엑스맨-최후의 전쟁>을 포기한 채 <슈퍼맨 리턴즈>에 전념한 이유는 그가 <슈퍼맨>의 열광적인 팬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싱어는 슈퍼맨이라는 캐릭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완전무결한 인간’이라는 슈퍼맨 신화는 <슈퍼맨 리턴즈>에서 다른 방식으로 변주된다. 완전한 인간이지만 그 때문에 현실 생활에서 설 곳을 상실한 ‘슈퍼맨의 비애’가 새로운 시리즈에서 드러난다.

사실 리처드 도너의 원조 <슈퍼맨> 시리즈에서도 슈퍼맨이 인류를 구해내는 장면 못지 않게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연인 로이스와의 사랑이었다. 1편에서 오로지 로이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시간을 거꾸로 돌렸던 슈퍼맨은 2편에서 심지어 로이스와 함께 하기 위해 초능력을 버리고 평범한 인간이 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슈퍼맨 리턴즈>에서 이미 가정을 꾸린 로이스와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싱어는 여기서 로맨틱한 여운을 남길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 천하무적이지만 내면적으로 상처 입는 슈퍼맨의 모습은 이 영화의 관심사 중 하나다. <슈퍼맨 리턴즈>는 이렇듯 영원히 고독해야만 하는 슈퍼히어로의 비애를 담아내며 <스파이더맨> <배트맨 비긴스> <헐크> 등 최근 등장한 일련의 슈퍼 히어로 영화들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번뇌하는 슈퍼 영웅의 이미지와 함께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슈퍼맨이 상대해야 할 악당이다.

브라이언 싱어가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발굴해낸 배우 케빈 스페이시가 연기한 악당 렉스 루터는 <슈퍼맨 리턴즈>에서 기회주의자 사기꾼으로서의 면모보다 슈퍼맨과 정면 대적할만한 증오심과 권력을 갖춘 적으로 등장한다. 과거 진 해크먼이 연기했던 유들유들한 루터와 또 다른 케빈 스페이시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발군이다.

유머도 늘었다. 싱어는 <슈퍼맨 리턴즈>를 가리켜 ‘자신이 만든 영화 중 가장 코믹하고 로맨틱한 영화’라고 말한 바 있다. 오리지널 <슈퍼맨> 시리즈보다 훨씬 비중이 커진 렉스 루터와 그 일당들이 벌이는 소동을 보는 재미가 만만찮은 것이다.

싱어의 말대로 <슈퍼맨 리턴즈>는 블록버스터 슈퍼히어로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를 해치지 않으면서 코믹한 변주를 통해 현대적인 슈퍼히어로 영화로 완성됐다.

존 윌리엄스의 웅장한 타이틀 음악과 남들 눈에 안 띈다면 누구나 한 번 입어보고 싶은 슈퍼맨의 쫄쫄이 의상, 매력적인 악당 렉스 루터까지, 새로운 슈퍼맨 시리즈는 기대만큼의 즐거움을 전해준다. 가장 고전적인 영웅의 이야기에 21세기의 기운을 교묘히 불어넣은 것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