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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자유를 위해 왕자도 버려 술·미인·명승 즐긴 호걸
풍류의 향기 <20> 양녕대군(上) - 천재적 문장가이자 명필… 崇禮門 편액이 친필



▲ 지덕사 뒤 관악산맥 국사봉 기슭의 양녕대군 묘. 부인 수성부부인 김씨와 합장되어 있다.

어느 날 양녕대군(讓寧大君)이 평양으로 유람을 떠나기에 앞서서 사사로이는 막내아우인 세종대왕(世宗大王)에게 인사를 하자 임금이 이렇게 당부했다.

“평양은 예부터 색향으로 이름난 곳이라 혹시 형님께서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부디 이번 행차에는 주색을 조심하시고 건강하게 편히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어찌 성려를 어지럽힐 수 있으리오. 주상께서는 심려를 놓으소서.”

그리고 길을 떠났는데, 세종대왕이 몰래 평안감사에게 파발마를 띄워 이런 밀지를 내렸다. ‘양녕대군이 평양에 이르거든 대접을 잘 하되 특히 잘 모신 기생에게는 큰 상을 주고 은밀히 결과를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평양에 다다른 양녕대군은 평안감사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대동강·모란봉·능라도·연광정·부벽루 같은 명승고적을 두루 구경하며 다녔다.

그런데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빈 듯한 느낌이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무슨 까닭인고. 아하, 그러면 그렇지! 천하의 풍류남아 양녕대군 가는 곳에 술과 미인이 없으니 명승유람만 가지고서야 어찌 성이 찰 수 있으랴.

하지만 임금과 한 약속이 있으니 드러내놓고 여자타령을 하기도 민망한 노릇이었다. 그때 나타난 절색이 있었으니 곧 평양명기 정향(丁香)이었다. 재색을 겸비한 정향에게 빠져 명승고적이며 산천경개는 그만두고 양녕대군은 나날이 쏜살같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운우지락에 흠뻑 빠져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밤이었다. 양녕대군은 눈물을 흘리며 정표를 간청하는 정향의 치마폭에 이별의 시를 써주었다.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듯 거침없는 필치였다.

평양명기 정향의 치마폭에 써준 사랑의 시

-그대 한번 이별하면 만날 길 없으리니
앞으로 어디에서 다시 만나리.
연지곤지 고운 얼굴 누가 보리오.
눈썹에 서린 수심 저 거울은 알리라.
달빛은 어이하여 비단베개 엿보며
새벽바람 무슨 일로 휘장을 흔드는고.
다행히도 뜰 앞에 저 향나무 서 있기에
봄뜻에 이끌려 그 가지 하나 꺾었노라. -


그리고도 여백이 남아 스스로 흥취를 못이긴 양녕대군은 이런 시도 덧붙였는데, 일필휘지하는 그의 모습을 곁에서 훔쳐보며 정향이 야릇한 미소를 흘리는 것은 알지 못했다.

-이별 길에 향기로운 구름 흩어지고
떠나는 정자 위엔 조각달만 걸렸구나.
가련하다 잠 못 이뤄 뒹구는 밤에
누가 있어 그대 수심 달래어주리. -


양녕대군이 떠나기가 무섭게 평안감사는 ‘얼씨구 좋구나!’ 하면서 이 귀중한 증거물인 치마폭을 대궐로 급히 올려 보냈다. 세종대왕이 유람 길에서 돌아온 양녕대군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이렇게 물었다.

“형님. 듣기에 이번 길에는 주색을 삼가셨다지요?”
“아암! 냄새도 못 맡고 구경도 못했소이다.”
“참으로 적적하셨겠군요?”

세종대왕이 빙긋 웃으며 다시 묻자 속으론 뜨끔했지만 양녕대군은 이렇게 얼버무렸다.

“아, 뭐 별로… 그랬지요.”

그때였다. 병풍 뒤에서 풍악에 맞춰 이런 노래가 들려왔다.

-그대 한번 이별하면 만날 길 없으리니
앞으로 어디에서 다시 만나리.
연지곤지 고운 얼굴 누가 보리오… -


아니, 이럴 수가! 양녕대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 노래는 내가 평양에서 정향의 치마폭에 써준 바로 그 시가 아닌가. 그러자 세종대왕이 웃으면서 감춰두었던 문제의 치마를 보여주며 물었다.

“형님. 이건 뭐지요?”

얼굴이 붉어진 양녕대군이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신 뒤 이렇게 둘러댔다.

“아, 뭐 그런 것이 다 있었구먼!”

그리고 두 형제는 마주보며 큰소리로 한바탕 웃어댔다. 결국 세종대왕의 배려로 정향은 양녕대군의 소실이 되었다.

아우 세종에게 왕위 넘겨주려 일부러 미친짓



▲ 양녕대군의 묘소와 사당 지덕사 전경.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장승백이에 있다.
▲ 양녕대군의 친필인 소동파의 '후적벽부' 8곡 병풍의 목각판. 지덕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동안 양녕대군은 어려서부터 놀기만 좋아하여 글공부를 게을리했고, 장성해서는 주색에 빠져 방탕한 세월을 보내 세자 자리에서 쫓겨난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그는 사실 당대의 명필이요, 문장가였으며, 학문이 깊은 천재였다. 단지 그런 사실을 가슴 깊이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기에 부왕인 태종도 잘 몰랐을 뿐이었다.

양녕대군은 자유와 왕좌를 맞바꾼 우리 역사에서 매우 이채로운 인물이요, 우리나라 풍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호걸이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왕위를 두고 부자 간, 형제 간의 피비린내 진동하는 골육상쟁은 비일비재했지만 임금 자리가 거추장스럽다고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양녕대군은 부왕의 뜻이 셋째 왕자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있음을 눈치 채고 일부러 미친 척하여 절대 권력이 보장된 세자 자리를 미련 없이 버리고 자유와 풍류를 찾아 대궐의 높은 담을 훌쩍 타넘었다. 그런 까닭에 왕조사의 국외자로서 주유천하로 일관했건만, 왕관과 자유를 맞바꾼 그의 통쾌한 용기와 풍류의 일생은 후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남은 것이다.

국보 제1호 남대문의 본래 이름은 숭례문인데, 편액의 ‘崇禮門’ 세 글자가 양녕대군의 친필이다. 또한 서울 동작구 상도4동 221번지, 관악산맥이 한강변으로 뻗어 내린 국사봉 기슭의 장승백이약수터에 그의 묘소와 사당인 지덕사(至德祠)가 있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글자 한글을 만들고,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진 명군 세종대왕이 있기에는 큰형님 양녕대군이 세자위를 미련없이 넘겨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양녕대군의 이름은 이제, 자는 후백(厚伯)으로 태조 3년(1394)에 뒷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李芳遠)의 맏아들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방원이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것은 4년 뒤. 다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 정종(定宗)마저 쫓아내고 스스로 왕좌에 오른 것은 6년 뒤인 1400년 11월이었다.

그때 태종은 34세, 양녕대군은 7세였다. 양녕대군은 태종 4년(1404) 11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태종은 왕비 원경왕후 민씨에게서 4남 4녀를 두었고, 많은 후궁을 거느리며 8남 13녀를 두었으니 자식이 모두 12남 17녀, 29명이나 되었다.

그런 부왕을 닮았는지 양녕대군 또한 나이가 들어갈수록 성격이 호탕해져 글공부보다는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고 즐기게 되었다.



입력시간 : 2006/07/05 14:40




황원갑 소설가·한국풍류사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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