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보다 먼저 일어서는 시인

김소월, 한용운, 윤동주, 서정주 등과는 너무나 다른 색깔과 목소리를 지니고 있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저 없이 ‘국민시인’으로 불리는 김수영(1921-1968)이 한때 소설을 쓰고 싶어 했고, 실제 소설을 썼다는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물론 그의 소설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고 그는 다시 시 쓰기에 매진했다. (짧은 분량의 소설 몇 편은 김수영 스스로 불태워버렸고, 계획했던 장편소설은 서두만을 쓰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어쨌든 ‘시인 김수영’이 소설을 쓰고 싶어 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은 김수영과 김수영의 시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서울, 서울, 서울에 오래 살면서 나는 서울이 무엇인지 모른다. 내가 소설을 써보려는 것도 이 알 수 없는 서울을 알려고 하는 괴로운 몸부림일 것이다. 알 듯 알 듯 하면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서울은 무엇인가? 이 결론 없는 인생 같은 서울, 괴상하고 불쌍한 서울, 이 길고 긴 ‘서울’에서까지의 숨 가쁜 노정에서 잠시 땀이라도 씻고 가기 위한 짧고 안타까운 휴식 같은 것이 나의 소설일 것이다.”

이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돌아온 김수영이 억지춘향격인 신문기자로, 번역료를 떼이기 일쑤인 번역가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던 무렵에 쓴 메모의 일부다. ‘서울을 알려고 하는 괴로운 몸부림’, ‘서울에서까지의 숨 가쁜 노정’이란 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김수영은 일제 식민지배가 완전히 고착된 후인 1921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환경 덕에 비록 병약하기는 했지만 부족함 없이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성장했다. 해방 전에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가 징병을 피해 만주로 피신, 다시 해방 후에 서울로 돌아와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며 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문물을 향유하고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피난을 떠나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아 있던 김수영은 인민군에 의해 다른 문인들과 함께 북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강제 징병되어 훈련을 받고 의용군으로 전장에 배치됐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유엔군의 포로 신세가 된 김수영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억류된다.

영어에 능통했던 덕에 통역 담당이 되었지만 포로수용소에서의 체험은 진저리처지는 지옥 그 자체였다. 피난지인 부산에 머물다 전쟁이 끝난 후 가까스로 서울로 돌아왔지만, 완전히 폐허가 된 서울은 그에게 ‘아늑하고 푸근한 고향’일 수 없었다.

집안 대대로 서울토박이인 김수영에게 서울은 고향, 그러나 언제나 ‘낯선 고향’이었다. 남의 나라의 식민지가 된 고향에서 그는 남의 나라의 말을 모국어처럼 읽고 쓰며 성장기를 보냈다. 유학으로, 피신으로, 전쟁으로 고향을 등졌다가 천신만고 끝에 다시 고향에 돌아와도 서울은 그에게 어머니의 따뜻한 품과 같은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지 못했다.

대신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혼란과 혼돈, 아귀다툼 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대립, 사회적 모순과 경제적 불안뿐이었다. 김수영은 환멸과 무기력에 빠져들었다. 서울은 그 자신이 표현한대로 ‘결론 없는 인생’, ‘괴상하고 불쌍한’, 타향보다 낯선 고향이었던 것이다.

‘서울을 알려고 하는 괴로운 몸부림’과 일제강점기-해방공간-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그 ‘숨 가쁜 노정’은 과연 시보다는 소설에 어울릴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설을 쓰려던 김수영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속의 ‘산문적 열망’을 ‘시’로 승화시키는 일이었다. 시가 김수영의 진정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서울에서 안락함과 푸근함을 느낄 수 없었지만(자신의 고향을 찬미하는 시를 지은 시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순과 부조리로 점철된 인간과 역사의 모습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김수영은 특유의 커다란 두 눈을 부릅뜨고, 분노와 자유를 가슴에 담고, 고향인 서울을, 그 격동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그것이 우리가 “어째서 자유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 가를”이나 “혁명은 /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등의 싯귀를 기억하는 이유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결국 혁명은 미완으로 그쳤고, 김수영은 절망 속에서 군사독재의 시작을 지켜봐야 했다.

김수영은 불 같이 뜨거운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넘치는 에너지와 매력의 소유자이기도 했지만 정서적으로 불안정했으며 극단적인 성격과 폭음, 기행 등으로 가까운 사람들을 적잖이 힘겹게 했다.

반복되는 우울과 무력감으로 스스로도 고통 받았다. 물론 그러한 것들은 창작의 동력이 되어 불멸의 시를 탄생시켰고 빛나는 예술적 성취도 이뤘다. 그러나 ‘시인 김수영’이 아닌 ‘인간 김수영’은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외롭고 불완전한 인간이었다.

▲ 김수영 시인

<김수영 평전>은 뜨거운 격정과 치열한 예술정신을 지닌 시인 김수영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객관적인 시선과 균형 잡힌 목소리로 인간 김수영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 책이 역시 당대의 시인인 최하림에 의해서 쓰여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평전의 행간 곳곳에서 김수영을 향한 최하림의 지극한 애정과, 같은 시인으로서 고민하고 공감하는 삶의 진실들이 묻어난다.

그러나 최하림은 김수영을 찬양하지는 않는다. “시는 새로운 면만을 담는 그릇이 아니다. 시대를 증명하는 목소리도 아니다. 시는 인간의 정서적이며 지적인 어떤 정신과 기능의 통일체다”라고 말하며 그는 숨는 듯 드러나는 저자로 시인으로서의 김수영과 인간으로서의 김수영을 조화롭게 아우르고 있다.

나아가 이 평전은 한 인간의 전부, 그 모든 것을 온전하고 완벽하게 재현하고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독자에게 신뢰를 얻고 평전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김수영은 한때 소설을 쓰고 싶어 했다. 또한 김수영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남편이었고, 형제였고, 연인이었고, 친구였다.

직장을 그만둔 후 집에 닭장을 짓고 양계를 업으로 삼기도 했고, 신문을 통해 문사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술에 취해 서울의 쓸쓸한 밤거리를 비틀비틀 걸어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시인이었다. 이름뿐인, 허울뿐인 시인이 아니라 가슴으로 시를 쓰는 진정한 시인이었다. 그의 시들과 이 책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가 쓴 시처럼 ‘풀은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선다.’ 그러나 그런 풀보다 먼저 눕고 먼저 울고 먼저 일어서는, 김수영, 그는 시인이다.


이신조 소설가 coolpond@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