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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이태백도 울다 갈 호방한 삶
풍류의 향기 <20> 양녕대군(下) - 미모의 여인 '어리'와의 부적절한 사랑… 25명의 자녀 남겨



▲ 자유와 왕위를 바꾼 풍류호걸 양녕대군의 사당 지덕사 입구.

양녕대군이 세자위에서 폐출된 이유로는 똑똑하고 성실한 막내아우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위해 일부러 미친 척했다는 설과 어리(於里)라는 미인 때문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어쨌거나 부왕의 눈밖에 밀려났다는 사실에는 다름이 없다.

양녕대군은 14세 때에 김한로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 어른이 되었지만 몰래 대궐을 빠져나가 사냥과 주색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시중의 건달패와 기생들까지 궁중으로 끌어들여 술판을 벌였다. 그러니 부왕의 귀에 보고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세자 양녕대군이 부왕과 중신들의 눈 밖에 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 둘째 효령대군(孝寧大君)은 더욱 근신한 채 하루 종일 글공부에 열심이었다. 혹시 형이 쫓겨나면 세자 자리는 내 차지라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양녕대군이 그런 효령대군의 속셈을 간파하고 여러 차례 면박을 주었다.

형의 뜻을 알아챈 효령대군이 마침내 미련을 버리고 그의 뒤를 따라 세자위를 포기했다. 그렇지만 효령대군도 인간인지라 속으로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절에 찾아가 분을 못 이겨 온종일 북을 치니 북 가죽이 찢어져버렸다. 그래서 ‘효령대군 북 치듯 한다’는 속말이 생겼다고 전한다.

가인박명 어리와의 비극적 사랑

어리란 여자는 양녕대군이 소문만 듣고도 선물을 보낼 만큼 빼어난 미인이었다. 어리는 그때 지중추부사 곽정의 첩이었다. 태종 17년(1417) 어리가 서울 친척집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양녕대군은 좋은 기회라고 여겨 그 친척을 통해 선물을 보냈다. 그러나 어리는 이미 남의 부인인지라 그 선물을 받을 수 없다면서 돌려보냈다.

몸과 마음이 온통 달아오른 양녕대군은 말을 달려 그녀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찾아가 다짜고짜로 말에 태워 동궁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이 노발대발했다. 세자의 측근은 모조리 엄벌에 처하는 한편, 어리도 직접 불러 문초했지만 그녀에게는 아무 죄가 없었다. 태종은 다시는 세자를 만나지 말라고 한 뒤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어리에 대한 사랑으로 미칠 지경이 된 양녕대군은 그 뒤에도 부왕 몰래 어리를 만나 마침내 아이까지 낳게 했다. 이 사실을 알고 대노한 태종은 양녕대군의 장인을 나주로, 세자를 두둔하던 영의정 황희(黃喜)는 남원으로 귀양 보내고, 세자빈은 친정으로 내쫓았으며, 동궁의 문지기와 내시들은 모조리 목을 쳤다.

참을 수 없게 된 양녕대군이 부왕에게 이런 글을 올렸다. ‘부왕께서는 많은 후궁을 두고, 또 여자들을 무시로 궁에 출입시키면서 왜 세자궁에 여자를 들이는 것은 금하십니까?’ 태종은 그 편지를 읽고 분기탱천하여 세자를 갈아 치울 결심을 굳혔다. 그는 중신들을 불러들여 세자폐출을 결의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으니 1418년 6월이었다.

양녕대군은 세자위에서 쫓겨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죄인이 되어 경기도 광주로, 다시 이천으로 유배당했다. 어리를 만나게 해달라는 청이 거부당하자 양녕대군은 지키는 군사들 몰래 담을 타넘어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그해 8월에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은 부왕 태종과 아우 세종은 걱정이 태산 같아서, ‘양녕을 찾아오면 많은 상을 주겠다’고 했다. 군졸들이 어리의 집을 샅샅이 뒤졌으나 찾지 못했고, 그 사이에 어리는 강압에 못 이겨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비관하며 스스로 목매 죽어버렸다. 양녕은 아차산 바위틈에서 발견되어 대궐로 끌려왔다.

태종과 양녕대군 부자 간의 갈등은 세종 4년(1422) 태종이 64세로 세상을 뜨면서 막을 내렸다. 그때 양녕대군의 나이 29세였다.

그러나 양녕대군 3형제의 우애는 매우 두터워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예나 이제나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는 아첨꾼과 기회주의자들은 있게 마련이어서 양녕대군의 세자 시절 허물까지 들춰내 귀양을 보내자느니 죽여야 한다느니 참소하는 자가 많았다. 그때마다 세종은 이런 말로 과잉충성자들의 입방아에 쐐기를 박았다.

“원래 이 자리는 양녕대군이 앉을 자리가 아닌가. 한갓 민간의 필부라도 형제 간의 잘못은 감춰주고 좋은 점은 추켜주는 것이 도리요, 불행히도 죄를 지으면 하다못해 애걸도 하고 뇌물이라도 써서 모면토록 하는 게 형제 간의 의리며 인정이거늘, 하물며 나는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민간의 필부만도 못하게 형님도 도와주지 말라는 말인가?”

"살아서는 왕의 형, 죽어서는 부처의 형"

한편, 효령대군은 불교에 귀의하여 자주 절을 찾고 불공을 드리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냥길에서 돌아오던 양녕대군이 꿩·노루·토끼 따위를 잡아 효령대군이 머물고 있는 양주 회암사에서 떠들썩하게 술판을 벌였다.

“형님! 살생을 금하는 불전에서 이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이 사람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걱정 없으니 가서 염불이나 외라구.”
“…?”
“안 그런가?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 될 터인데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허허허허!”

이처럼 양녕대군은 세상을 거침없고 호탕하게 살았다.

1450년 세종대왕이 재위 32년 만에 54세로 세상을 떴을 때 양녕대군은 57세였다. 이어서 즉위한 문종이 병약하여 2년 3개월 만인 1452년 5월에 39세 한창 나이로 죽고 겨우 12세의 어린 단종이 뒤를 이었다. 조정에는 또 한 차례 피바람이 불었다.

1453년 10월에 야심만만하던 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난이란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 사육신을 비롯한 수많은 충신을 무참히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데 이어, 다시 2년 뒤 6월에는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하니 그가 곧 세조이다. 이때 세조의 백부 양녕대군은 62세로 왕실 종친 가운데 가장 높은 어른이었다.



▲ 양녕대군 묘비. 1910년 경술국치 전날인 8월 28일 밤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 난 것을 근래에 다시 붙여 세웠다.


자유를 위해 미련 없이 왕좌를 버렸던 일세의 풍류호걸 양녕대군은 세조 8년(1462) 음력 9월 6일에 69세를 일기로 천수를 마쳤다. 그는 정실에게서 3남 4녀, 후실에게서 7남 11녀, 모두 10남 15녀 25명의 자손을 두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도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임종시 그는 자녀들에게 “내가 죽으면 호화로운 장례를 치르지 말고 묘비도 상석도 만들지 말라”고 유언했다.

꾸밈없는 천성에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세상을 살다간 양녕대군은 지금 서울 동작구 상도4동 221번지에 잠들어 있다. 강정공(剛靖公) 양녕대군과 한때 세자빈이었던 수성부부인 김씨 부부의 합장묘 앞에 있는 묘비는 1915년에 새로 세운 것이고, 본래의 비석은 1910년 8월 28일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 전날 밤 난데없는 벼락이 떨어져 두 동강으로 깨져버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아서 전해오는 양녕대군의 필적은 앞서 말한 숭례문 편액과 소동파(蘇東坡)의 ‘후적벽부(後赤壁賦)’ 8곡 병풍 목각판이 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은 양녕대군에 대해 이렇게 썼다. ‘양녕은 젊어서부터 글을 잘했으나 세종이 덕이 있음을 알고 겉으로 글을 알지 못하는 척하면서 미친 듯 스스로 방탕한 행동을 했으므로 위에서도 그가 글 잘하는 줄을 몰랐다. 늘그막에 양녕이 어떤 중에게 써준 시에 이런 것이 있다.

산허리에 둘린 안개로 아침밥을 지어먹고
밤에는 댕댕이덩굴에 걸린 달빛으로 등불을 삼네
외로이 바위에 누워 잠자니 마치 한층 탑과 같구나.


아무리 글 잘하는 문장가로도 이보다 더 잘 짓지는 못하리라. 양녕이 비록 덕을 잃어 폐세자는 되었지만 미친 척하고 자취를 감추어 호방하게 지낸 일은 실로 태백(泰伯 : 주문왕의 삼촌)의 행동과 같았다.’



입력시간 : 2006/07/12 13:46




황원갑 소설가·한국풍류사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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