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지혜 사이

누구나 한 번쯤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지식검색’을 이용해 봤을 것이다. 매일같이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지고 그 질문 대부분에 실시간으로 상세하고 친절한 답변들이 붙는다. 지식검색이 아니더라도 정보가 필요할 때 인터넷을 활용한다는 것은 21세기로 접어든 후 엄연한 ‘상식’이 되었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여느 집 거실 한쪽엔 보통 수십 권이 한 질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빼곡이 꽂혀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십여 년 새 ‘세상의 모든 지식’이었던 수십 권의 백과사전은 손바닥만한 CD 한 장에 쏙 빨려 들어가 버렸다. 인터넷 상의 방대한 자료들을 떠올린다면 이제 누구도 백과사전이 담긴 CD 한 장을 세상의 모든 지식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편리와 효율의 측면만 놓고 본다면 인터넷이 가져다 준 발전과 진보는 실로 엄청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시간의 절약과 이윤의 증대만으로 인간을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임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우리에겐 인터넷으로 누리게 된 편리와 효율만큼 역시 인터넷으로 야기된 해악과 폐단이 존재한다. 양쪽 모두 일일이 그 예를 열거하지 못할 정도다. 인간에게 간편함과 능률을 제공한 무언가는 어김없이 그에 따른 거추장스러움과 말썽도 함께 제공한다. 참으로 편리하게 된 세상은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참으로 불편하게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역설적이다.

당연하게도 이 시대에는 초등학생의 숙제도 대학생의 리포트도 인터넷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지금의 학생들이 인터넷 없이 숙제를 하고 리포트를 써야 해야 했던 예전의 학생들보다 더 뛰어난 학습 능력과 더 높은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사람들은 보다 빠른 이동이 가능해질수록 더 많은 시간을 이동에 소비한다.”

20세기 최고의 지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영국의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1872-1979)은 ‘역설의 대가’로도 불린다. 그는 특유의 간결하고도 위트 넘치는 문장으로 유명한데, 역설을 통해 현대사회의 모순을 고발하고 부조리한 문제들의 핵심을 간파한 많은 글을 남겼다.

과학자, 수학자, 철학자, 논리학자로도 이름을 떨친 그는 다양한 방면에서 왕성한 집필활동을 펼쳤다. 시나 소설을 쓴 문학가가 아님에도 그에게 ‘노벨문학상’이 주어진 것은 그가 수많은 저작을 통해 끈질기게 인간과 역사와 사회의 ‘이면(裏面)’을 들여다본 것에 일생을 바친 공로가 인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과 그밖의 것들>은 1931년에서 1935년 사이 버트런드 러셀이 신문에 발표한 짧은 칼럼들을 모은 책이다. 70년도 더 전의 사회문제를 다룬 글들이 지금에도 공감을 주며 읽힐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완전한 기우에 가깝다.

1차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전쟁의 광기에 휩싸여 있던 당시의 세계정세를 그는 이렇게 비꼰다.

“미국은 영국에 돈을 빌려주고 영국은 그 돈을 독일에 빌려주고, 독일은 그것은 영국과 프랑스에 (전쟁) 배상금조로 되돌려주려다가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이 계속 배상을 이행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그 돈을 군비조성에 쏟아 붓는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조직화된 살육 외에 다른 결론이 있을 수 없고, 그러한 상황에서는 애초에 존재했던 미미한 부조차도 모조리 파괴되고 말 것이다.”

1930년대에 이미 러셀은 자본주의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이기적인 욕망과 거짓된 이중성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평균적인 아줌마는 다른 아줌마들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산다. 자기 남편이 그들의 남편들보다 부자이고 자기 아이들이 더 성공적이라는 점을 설득하고자 애쓴다. 만약 그녀가 부유하다면, 집안 관리와 장식 면에서 이웃들보다 나은 취향을 과시하려고 애쓴다. 이웃들도 똑같은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대단한 기술과 많은 사고가 요구된다.”

1930년대의 유럽 중산층 아줌마들과 2000년대의 한국 중산층 아줌마들이 그토록 닮아 있다는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러셀은 자기모순에 빠진 현대인들의 무기력과 현실도피를 걱정하고 고민했다. 그것이 곧 세상에 대해 수수방관과 회의주의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날씨에 대해 소견을 갖고자 할 경우 공식 기상예보를 읽는다. 나는 이따금 그가 신문의 도움 없이는 지금 현재 비가 오는가 맑은가 조차도 말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마저 받는다. 정치나 세계정세, 혹은 구시대의 강건한 미덕으로 복귀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는 그의 견해는 신문에서 끌어왔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그는 거의 모든 사안에서, 성가시게 자기생각을 갖지 않는다. 전문적 연구나 경험을 갖추고 있어 권위 있게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러셀은 냉소와 역설로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틀고 풍자했지만, 염세적이고 암울한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지는 않았다. 그는 재치와 혜안으로 가능한 희망과 대안을 제시하려고 애썼다. 그는 모든 현안의 앞면과 뒷면을 동시에 보게 하는 사회비평가로서의 역할을 평생 충실히 이행했다.

수십 권의 백과사전은 작은 CD 한 장에 담기고, 인터넷 안에는 엄청난 양의 지식들이 끝도 없이 쌓여간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인간의 지식이 늘은 만큼 과연 지혜도 늘었을까.

지식검색은 있을 수 있어도 ‘지혜검색’은 있을 수 없다. 지혜는 러셀의 표현대로 ‘천천히 생각하는 가운데 한 방울 한 방울 증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존재하지 않았던 1930년대에 씌어진 러셀의 짧은 글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그 안에 정치, 경제, 종교, 교육, 여성, 사랑, 인권, 전쟁, 역사에 대한 지식들이 지혜가 되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또 하나의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그 어려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역사 공부에서, 우정이나 사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와 다른 개성들을 이해하고자 점진적으로 시험적으로 접근하는 과정이다.
/ 사람을 어떤 범주에 집어넣는 방식이나, 많은 이들이 저마다 자신하는 직관능력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그 두 방식의 결합은 필요하겠지만 결합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 근거 없는 멸시에서 나오는 독단적 자신감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필수적인 요소다.”


이신조 소설가 coolpond@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