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 퓨리어스 - 도쿄 드리프트'

가히 ‘시리즈 영화의 홍수’라고 할 수 있는 올 여름에 또 한 편의 영화가 추가됐다.

<분노의 질주> 세 번째 시리즈가 원제목인 ‘패스트 앤 퓨리어스’를 그대로 달고 나왔다. 제목을 바꿔 달고 전편들과 차별성을 부각시키려 한 <패스트 & 퓨리어스-도쿄 드리프트>(이하 <도쿄 드리프트>)는 1, 2편과 달라진 지점들이 눈에 띈다.

전편의 주인공 폴 워커가 재등장해 속편 성격이 강했던 <분노의 질주2> 대신 신인 루카스 블랙이 주인공으로 나선다. 영화의 무대가 일본의 도쿄로 옮겨졌고 1, 2편에서 주의를 끌었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속도경쟁에 ‘드리프트’라는 신기술을 선보인다.

롭 코헨(<분노의 질주>)과 존 싱글턴(<분노의 질주2>) 등 검증된 중견감독이 아닌, 신인 저스틴 린이 메가폰을 잡은 것도 이 영화를 전작들과 차별 짓는 요소 중 하나다. 노련미는 떨어지지만 패기와 의욕은 충천하다.

도쿄의 미국인 반항아

이혼한 부모 슬하에서 자라 반항심이 가득한 고교생 션(루카스 블랙)은 스트리트 레이싱을 즐기다 큰 사고를 친 뒤 소년원에 가지 않기 위해 아버지가 살고 있는 도쿄로 쫓겨가다시피 떠난다.

일본에서의 낯선 일상과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션은 우연히 미국인 친구 트윙키(바우 와우)에게 도쿄에서 은밀히 유행하고 있는 드리프트 레이싱에 대해 듣는다. 호기심에 찾아간 레이싱 경기장에서 션은 일본인 마피아 D.K(브라이언 티)와 그의 여자친구 닐라를 사이에 두고 시비가 붙는다.

우여곡절 끝에 드리프트 레이싱 경주에 가담하게 된 션은 D.K에게 참패하고, 션에게 자동차를 빌려준 D.K의 동업자 한은 션의 열정을 알아보고 그에게 드리프팅 기술을 가르친다. 션은 닐라와 가까워지고, 드리프팅 기술도 나날이 향상된다. 마침내 첫 게임에서 망신만 당했던 그에게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온다.

좁고 구불구불한 길에서 레이싱의 쾌감을 만끽할 수 있는 레이싱 테크닉 드리프트(Drift) 기술은 <도쿄 드리프트>가 보여주려는 스펙터클의 핵심이다. 시속 16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브레이크와 액셀레이터를 적절히 사용해 급커브를 도는 기술을 뜻하는 드리프트는 이 영화가 왜 광활한 미국이 아닌 좁고 아기자기한 도쿄를 선택해야 했는지에 대한 답이기 때문이다.

속도를 내기 힘든 도쿄의 복잡한 시내와 지하 주차장, 낭떠러지 외길은 레이싱 액션 무비인 이 영화의 스릴을 더해 주는 더할 나위 없는 장치다. 이국적인 도쿄의 밤과 낮 풍경, 한국인에게는 친숙하지만 외국인에게는 낯설기 짝이 없는 일본 고등학교의 전경도 미국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요소들로 적절히 양념 구실을 한다.

여기에 폭스바겐의 미공개 신차부터 닛산, 도요타, 미쯔비시, 그리고 미국의 머스탱, 닷지 바이퍼, 등 화려한 튜닝카들이 미끈하고 날렵한 자태를 뽐낸다.

오로지 레이싱을 위해

하지만 외적인 화려함은 한두 번의 시각적 즐거움 이상을 주지는 못한다.

<도쿄 드리프트>는 늘씬한 레이싱 걸들과의 신나는 레이싱과 마피아만 존재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낯선 곳으로 모험을 떠나 그곳에서 정신적 성숙을 경험하는 일반적인 성장영화의 공식을 따라가지만, 주인공을 가혹한 현실에서 낭만적인 판타지로 이행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 길은 일반 성장영화와 반대다.

현실에 눈을 뜨고 어른이 되는 대신, 션은 이혼한 부모 밑에서 사고뭉치로 지내던 자신의 처지를 스트리트 레이싱의 쾌감을 빌어 망각해버린다. 망아(忘我)의 지경으로 치닫는 스피드 속에서 느끼는 쾌감과 현실망각은 <도쿄 드리프트>가 관객에게 전이시키고 싶은 감정의 실체인 셈이다.

그런 이유로 영화에 나오는 소년, 소녀의 출생에 얽힌 아픔, 악당 D.K가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느끼는 쓰라린 감정은 결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인물과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하는 채 바라보는 몇 번의 레이싱 장면들은 처음엔 그럴듯하지만, 반복될수록 지루함만 더할 뿐이다.

<도쿄 드리프트>는 1, 2편의 이야기를 부정하는 대신 현란한 이미지로 관객들을 압도하는 전술을 구사한다. 전편들의 이미지는 그대로 이어가되 신인들을 내세워 분위기 쇄신을 꾀했고, 그 노력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뉴페이스와 시각적 분열증을 일으킬 정도로 현란한 영상유희는 분명 이 영화의 강점이다. 그러나 그 이상을 기대하긴 힘들다. 레이싱과 레이싱 사이를 억지로 연결짓기 위해 대충 이어 붙인 드라마는 레이싱 장면의 재미마저 반감시킨다.

말초적인 쾌감을 자극하는 레이싱 장면을 제외한다면,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라는 소리를 듣기에 딱 알맞다.

<올드보이> 미국 리메이크판의 감독으로 낙점된 저스틴 린의 이러한 연출은 몇몇 뛰어난 장면이 아깝게 느껴질 정도로 공허하기만 하다. 레이싱 장면을 끼워넣기 위해 줄거리를 짜맞춘 듯한 드라마 전개는 속이 너무 뻔히 들여다보이는 구성이다.

<도쿄 드리프트>는 레이싱 마니아나 인터넷 게임 ‘카트라이더’에 중독된 사람들을 위한 영화가 될 수는 있다. 레이싱으로 시작해 레이싱으로 끝나는 이 영화의 실체는 현실을 잊고 쾌락에 몸을 맡기는 강한 최음제 구실을 한다.

일본인이 일어보다 영어를 더 자유롭게 구사하고, 모델 같은 몸매의 미녀들만 활보하는 이 화려한 세계가 할리우드 장사치들의 텅 빈 머리 속에서 나온 ‘가짜’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이 가짜 볼거리조차 찰나의 쾌락 이상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