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적 로맨티시즘을 남긴 요절시인 - 박인환 전집 / 문승욱 엮음 / 예옥 발행 / 3만5,000원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 1926년에 나서 56년에 졌으니 올해는 그의 탄생 80주년이자 50주기를 맞는 해다.

때마침 고서 수집가 문승욱 씨가 새로 찾아낸 시 7편과 산문 44편을 더해 명실상부한 ‘박인환 전집’을 펴냈다. 여러 모로 뜻깊은 일이지만 사실 박인환의 지명도에 비춰볼 때 늦디 늦은 전집인 것이 분명하다. 그와 더불어 당대 문학 기수로 흔히 거론되는 김수영의 경우는 사후 13년 만인 1981년에 번듯한 전집이 출간됐으니 말이다.

박인환은 생전에 두 권의 시집을 남겼다. 김수영·김경린을 비롯한 ‘신시론’ 동인들과 함께 쓴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년)과 작고하기 한 해 전 펴낸 개인시집 <선시집>에 통틀어 61편의 시를 담았다.

이후 유고집, 선집을 통해 소개된 12편에 편집자 문승욱 씨가 찾아낸 7편을 더해 전집에는 총 80편의 시가 실렸다. “몇 개월 동안 생업을 뒷전으로 하고” 1950년대 신문·문예지·여성잡지를 샅샅이 훑은 편집자의 집념은 특히 산문 부문에서 눈부시다. 전집 속 산문이 모두 70편이니 문 씨는 50년에 걸쳐 소개된 것보다 더 많은 작품들을 ‘몇 개월’ 만에 발굴해낸 것이다.

사실 박인환은 ‘진정’보다는 ‘제스처’로 기억되곤 하는 문학가다. 곰삭지 않은 듯한, 때론 치기까지 느껴지는 이국 취향이나 센티멘털리즘은 그의 작품을 애독하는 이들마저 가끔 민망하게 한다.

평단의 푸대접은 말할 것도 없고 한때 친우였던 김수영마저 저주에 가까운 비평-“(일본말은 물론이고) 조선말도 제대로 아는 편이 못 되었다” “신문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 등-을 가한 탓에 박인환은 늘상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작가로 인식됐다.

하지만 그가 생애 마지막 열 해 동안 생산한 작품 150편을 대하면 ‘목마와 숙녀’의 아우라로 그를 규정하려는 통념이 온당치 못한 것임을 느끼게 한다.

영화를 비롯해 문학·연극·사진·여성을 아우르는 전방위 비평은 광복과 한국전쟁이라는 문화적 불모지대에서도 박인환의 문화적 촉수가 놀랄 만큼 예민했음을 방증한다. 특히 미국과 유럽 영화 비평에서 보여주는 해박한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작품의 주요 경향을 짚는 것은 물론이고 감독·촬영감독·주연배우의 경력까지 줄줄이 꿰고 있다. 선후배 시인을 막론하고 단출하고 직선적인 문장으로 작품을 논하는 시평(詩評)도 인상적이다. 박인환의 방대한 독서량은 물론이고, 호불호를 과감히 밝히는 자세에서 시단의 ‘앙팡 테리블’을 자임하는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을 통해 현실 직시를 주저하지 않은 박인환의 면모도 재발견할 수 있다. ‘댄디즘’의 코드로만 그를 읽으려 드는 선입견에 대한 호쾌한 반란인 셈이다. 그의 20대를 관통했고 모든 실존을 극한 상황에 몰고 간 한국전쟁을 응시하는 눈매는 무엇보다 매섭다.

전쟁을 한 달여 앞두고 ‘(…)불안한 언덕에서/나는 음영처럼 쓰러져간다(…)’라고 예언하듯 읊은 시 ‘1950년의 만가’, 언론사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전선의 긴박한 상황을 타전한 기사 등은 그가 불안한 현실에 기꺼이 맞서는 강단을 갖췄음을 보여준다.

전집의 말미에 박인환 시론을 게재한 박현수 교수(경북대)는 전쟁을 구현한 동시대 시들과 견줄 때 그의 작품이 질적 우위에 있다고 평가한다.

전집 속 서간의 주요 수신자였던 소설가 이봉구는 수필 <명동백작>에서 1956년 이른 봄의 박인환을 추억한다.

명동 한복판 빈대떡 집에서 박인환은 작곡가 이진섭, 테너 임만섭과 즉석에서 신곡 발표회를 한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그 유명한 ‘세월이 가면’은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눈물난다. 어쩔라고 그런 노래를 지었노”라며 타박 아닌 타박하는 마담에게 또 외상술을 얻어먹고 그는 늘 그랬듯 장 콕토의 영화와 이상(李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요절하기 사흘 전 모습이었다.

이렇듯 그는 낭만·지성·열정으로 내면을 빼곡이 채우고 시대를 앞서 반응한 로맨티스트였다. 그가 펼친 문학의 지평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 이제 시작되려나 보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