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변의 여인'

<해변의 여인>은 영락없는 홍상수의 영화다. 온갖 매스컴의 초점이 된 고현정의 영화 데뷔도, 김승우의 변신도, 바깥의 화제일 뿐, 영화는 온전히 ‘홍상수’라는 견고한 세계 속으로 수렴된다.

<극장전>에서 생각을 더 해야겠다던 동수(김상경)의 헛헛한 발걸음은 이 영화에서 영화감독 중래(김승우)의 돌연한 서해안 여행으로 이어진다. 늘 그랬듯이 여행은 홍상수 영화의 시작이자 종결이다.

강원도든, 춘천이든, 경주든, 아니면 복닥거리는 종로 바닥이든 그는 묘연한 생각에 사로잡혀 떠나고 다시 되돌아오는 사람들을 다룬다. 홍상수의 일곱 번째 영화 <해변의 여인>에서 그 발걸음은 더욱 가볍고 여유로워진 듯하다.

새 작품의 시나리오를 구상 중인 영화감독 중래는 미술감독 창욱(김태우)와 그의 애인인 음악도 문숙(고현정)을 대동하고 서해안으로 여행을 떠난다. 창작을 빌미로 떠난 여행길이었으나 중래와 문숙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눈이 맞는다. 문숙의 애인을 자처하는 창욱의 눈을 피해 하룻밤을 보내지만 중래의 애매한 태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이내 어색해진다.

어색하게 이별한 뒤 혼자 다시 서해안을 찾은 중래의 앞에 문숙을 닮은 여자 선희(송선미)가 나타난다. 이번에도 빌미는 영화 창작이다. 자신을 감독이라고 소개한 중래는 작품을 위해 선희에게 인터뷰를 청하고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려던 찰나, 갑작스레 들이닥친 문숙으로 인해 세 사람의 관계는 꼬이기 시작한다.

<해변의 여인>에서도 홍상수는 자신의 일관된 관심사인 ‘반복’의 모티프를 반복한다. 두 남자와 한 여자에서 시작되었던 삼각관계는 한 남자와 두 여자의 관계로 바뀌고, 종국에는 모두 헤어진다.

<해변의 여인>은 이 지극히 홍상수적인 이야기 스타일을 가장 단순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단순해진 스타일 안에서 더욱 명징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의 영화 속에 일관되게 드러나는 특정한 이미지들이다. <해변의 여인>은 그 단순한 이야기 구조로 인해 역설적으로 홍상수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전작들의 모든 전형성을 집대성한 듯한 이 영화에서 홍상수는 투명하게 ‘구조’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보여준다.

<생활의 발견>의 경수, <극장전>의 동수, <해변의 여인>의 중래는 비슷한 궤적의 연애 패턴을 그리며, 문숙과 선희의 모습에서 <생활의 발견>의 명숙과 선영의 모습을 찾아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문숙이 외국 남자와 잤는지 여부를 두고 흥분하는 중래와 창욱은 <오! 수정>에서 수정의 순결함을 흐뭇해 하던 두 남자의 모습과 닮았다.

결국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은 같은 이야기 속에서 유사한 행위를 되풀이하며 비슷한 절망과 희망에 사로잡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위는 예측불가능한 우연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우연의 연속 안에서 일정한 패턴만을 드러내는 홍상수 영화에서 관객들은 우연이라는 비영화적인 사건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배우의 스펙트럼을 넓힌 연출

홍상수의 세계에서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는 <해변의 여인>이 각별한 이유는 영화감독이라는 주인공의 직업 때문이다.

인물의 사고 방식이나 고민거리를 디테일하게 표현해내는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이 영화감독이 됐을 때, 관객들은 뜻밖의 선물을 얻는다. 영화감독 중래의 고민거리는 영화감독으로서 홍상수의 고민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해변의 여인>이 홍상수 영화의 입문 가이드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홍상수는 중래의 입을 빌어 보다 자세하게 이미지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풀어낸다.

영화 중반에 중래가 도형까지 그려놓고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미지에 관한 이야기는, 비록 그것이 문숙이 이야기한 것처럼 개똥철학이라 할 지라도, 홍상수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홍상수가 심중의 이야기를 이처럼 친절하고 살뜰하게 들려주는 경우는 이제껏 없었다.

더욱 친절해진 홍상수 영화의 구심점을 이루는 건 주연배우 고현정과 김승우다.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친근해진 그들의 이미지는 너무 쉽게 깨져 버린다.

결혼 전 <모래시계>와 <엄마의 바다> <두려움 없는 사랑> 등의 정통 드라마에 출연해 전형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고현정은 <해변의 여인>에서 전형성의 껍데기 안에 숨겨진 맨 얼굴을 천연덕스럽게 드러낸다. 남자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는 귀여운 가식과 질투, 비루함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고현정의 연기는 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의 스펙트럼을 한 뼘쯤은 넓혀 놓는다.

마찬가지로 전까지 전형적인 장르영화를 통해 각인된 김승우 또한 설명할 수 없는 혼란에 휩싸인 영화감독 중래를 노련하게 연기한다.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공허한 의식의 틀을 부숴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홍상수의 영화는 이들 배우에 대한 대중들의 선입관마저 무너뜨리는 것이다.

<해변의 여인>은 홍상수 영화 중에서도 대중들에게 가장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일 것이다. 홍상수가 한발 물러났다기보다는, 보는 이들과 보다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감독의 의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세계를 망가뜨리지 않으면서도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하는 길을 찾고 있는 중이다. 한국에서 영화를 만드는 모든 비주류 감독들이 살아남기 위한 공통적인 고민을 홍상수도 피해갈 수 없었다.

여전히 획일성에 대한 강제가 은연중 존재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 전형성에 비껴나는 이미지들을 어떻게 주류영화 속으로 침투시킬 것인가. 지난 10년간 자신의 영화 세계를 공고히 지켜 온 홍상수 감독의 미묘한 변화는 기꺼이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