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빈 토플러·부의 미래 / 앨빈 토플러, 하이디 토플러 지음 / 김중웅 옮김 / 청림출판 발행 / 1만9,800원

우리 시대 최고의 선지자로 평가받고 있는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오랜만에 신간을 발표했다. <미래 쇼크>(1970), <제3물결>(1980), <권력이동>(1991)의 ‘미래사회 시리즈’를 잇는 두툼한 책이다.

전작들이 지식혁명을 맞닥뜨린 사회가 겪게 될 구조적 변화에 주목했다면 이번엔 한발 더 나아가 그런 격변 속에서 ‘부(富) 창출 시스템’이 어떻게 재편될까에 통찰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노학자가 상정하는 부는 단순히 화폐를 뜻하지 않는다. 지금의 측정 체계로는 적절히 다룰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부, 즉 비화폐 경제까지 총칭하는 개념이다.

비화폐 경제는 프로슈머(prosumer·생산적 소비자)들이 창출한다. 집안일, 육아, 자녀 교육, 부모 봉양처럼 가정의 울타리에서 당연스레 행하는 활동은 물론, 지역공동체나 동호회에서 정보를 나누거나 상부상조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돈으로 환산되지 않고 있는 무형의 생산이 각처에서 벌어진다.

지식경제의 높은 이윤은 프로슈머 경제를 화폐경제로 얼마나 끌어들이느냐에 달려 있다고 토플러는 지적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부 창출 시스템은 어떤 양상을 띨까. 저자는 경제 체계를 받치는 3가지 심층기반, 즉 시간·공간·지식을 요소 삼아 설명한다.

먼저 시간. 상품 및 금융시장에서 점차 타이밍이 중시되고 있다. 생산·유통·소비 등 제반 경제행위가 ‘동시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토요타 특유 생산방식인 JIT(Just In Time·적기 생산)가 앞다퉈 벤치마킹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둘째는 공간. 비즈니스 주체로서 국가에 필적하는 자치구역이 늘고, 세계화에 저항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시장은 세계적으로 통합돼 가면서 우주라는 든든한 부의 원천까지 포섭한다.

마지막으로 핵심적 요소는 지식. 제조품과 달리 공유가 가능할 뿐더러 공유할수록 가치가 커지는 미래 시장의 알짬이다. 무수한 정보와 데이터를 가치있는 지식으로 만들어 신속하게 유통시키는 능력이 관건이다.

네트워크 통합으로 창출되는 지식 집약적 시장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심층기반의 변화로 도래할 부의 미래는 도처에서 방해를 받는다. 기존의 경제학은 신경제로 갈수록 형편없는 예측과 전망만 내놓고 있다. 정부는 느릿한 의사결정과 공고한 규제정책으로 변화의 발목을 잡고, 거대한 공장처럼 변한 학교는 시대에 기민하게 적응할 인력 공급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토플러는 이런 ‘구악세력’의 개혁을 촉구하는 한편으로 부 창출 시스템에 걸맞은 창의적 사회모델을 설계할 ‘사회발명가’를 육성할 것을 주문한다.

토플러에게 아시아 경제의 도약, 특히 IT를 비롯한 신산업에서 보여주는 활력은 매우 인상적인 모양이다. 그는 중국·일본·한국을 필두로 한 동아시아 국가를 신경제의 중심에 설 유력후보로 지목한다. 반면 유럽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다. EU 통합에도 불구, 산업사회의 관성에서 좀처럼 못 벗어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결국 그의 심중엔 지식사회에서도 ‘슈퍼 파워’는 여전히 미국일 것이란 판단이 담긴 듯하다. 그가 본격적 세계화의 기점으로 꼽는 2차대전 이래 미국은 마셜 플랜이란 묘수로 자본주의를 수호했고 금융시장을 선도 중이며 최근엔 대량 생산품에 개인주의를 접목하는 기지를 발휘하고 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이런 상찬의 무게에 견줄 때 “미국은 반세기 동안 상대적으로 쇠퇴”했다는 진단 따위는 어쩐지 제 나라에 대한 가벼운 겸양처럼 느껴진다.

15년 만의 신간은 과연 명불허전이다. 토플러가 펼치는 논리는 언제나처럼 단순명료하고 그가 동원한 가멸찬 사례들과 단단히 맞물린다. 여든을 바라보는 미래학자는 인류의 앞날을 한없이 밝게 본다.

특히 과학과 기술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굳건해서 책 몇몇 대목은 마치 ‘과학이 세계를 구원하리라’는 잠언처럼 읽힐 지경이다.

이 책이 미래를 개연성 있게 보여주는 본연의 임무를 넘어 얼핏 마르크스 류(流)의 거대담론 냄새를 풍긴다면 그건 전적으로 토플러의 열렬한 낙관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비관주의는 대안이 될 수 없다”며 자기 입장을 강변하려 드는 것은 마뜩찮은 일이다. 우리가 토플러에게 기대하는 건 ‘미래 전망’이지 ‘장밋빛 미래’가 아니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