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추얼펀드 제국 피델리티 / 다이애나 B. 헨리크 지음 / 굿모닝북스 발행 / 2만1,000원

이 책의 원서가 출간된 1997년 무렵 굴지의 자산운용사 피델리티는 내우외환에 휩싸여 있었다.

몇몇 굵직한 금융 스캔들에 연루된 데 이어 간판상품 ‘마젤란펀드’마저 부적절한 운용이 드러나자 매출은 급감했다. 누적수익률 2,703%의 ‘전설’ 피터 린치가 2년 만에 돌아왔지만, 회사를 떠받치던 스타 펀드매니저 여럿이 떠났다. 이 와중에 네드 존슨 회장은 “아버지처럼 뭔가 보여주지 못한” 장녀 애비에게 경영권을 물려줄 채비를 하고 있었다.

뉴욕타임스에서 베테랑 금융 탐사보도 기자로 활약 중인 저자는 이 회사의 미래에 의구심을 감추지 않은 채 책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피델리티는 건재하다. 운용자금은 한국 국민총생산(GDP)의 2배를 훌쩍 넘는 1조3,000억 달러로 세계 1위다. 이 책이 적잖은 시차를 두고 번역 출간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일 테다.

하지만 외신에서 심심찮게 피델리티의 수탁고 및 수익률 감소를 거론하며 위기론을 제기하는 걸 보면 저자의 전망이 턱없이 빗나가진 않은 모양이다. 지난해 존슨 회장은 실적 쇄신을 위해 딸이 맡고 있던 자금관리 부문을 다른 임원에게 넘기기까지 했으니 후계자 자질을 시비한 것도 뜬금없어 보이지 않다.

그렇다고 책의 진가를 피델리티의 명운에 대한 묵시록적 서술에서 찾으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독서의 초점을 거기에 맞췄다간 책에 담긴 풍성한 의미를 맥없이 놓치는 우를 범하기 쉽다.

저자의 1차적 관심은 분명 보스턴 출신 명문가 존슨 집안이 60여 년간 ‘뮤추얼펀드 제국’으로 키운 피델리티 기업사에 있다. 허나 1898년생인 창업자 에드 존슨으로부터 3대에 걸친 경영 과정은 미국 주식시장 변천사와 고스란히 겹친다.

저자의 꼼꼼한 취재와 서술은 이 폐쇄적 가족기업의 비화 따위를 들추는 수준을 훌쩍 넘어 미국 현대사 이면을 옹골지게 묘사한다. 그것은 타인의 소중한 재산을 운용하는 관재인의 사명감이 남의 돈으로 자기 배 불리는 데 골몰하는 몰염치로 변질된, 펀드산업의 씁쓸한 풍경이기도 하다.

책은 크게 ‘에드 시대’와 ‘네드 시대’로 나뉜다. 이런 대별에 있어 보스턴이란 경제적 공간은 중요하다. ‘브라민’(인도 최상위 카스트 ‘브라만’에 빗댄 말)이라 불리는 이곳의 부유층은 스스로 재산을 불리려 아등바등하기보단 사설 관재인에게 점잖게 위탁하는 쪽을 택했다.

의뢰인을 위해 안정적 수익을 내고자 하는 관재인의 자산운용 방식은 보스턴에서 뮤추얼펀드가 탄생하는 동력이 됐다. 브라민 출신 변호사로 지역 금융계에서 경력을 쌓은 에드 역시 가치주에 투자해 확실한 수익을 거두는 전통 방식을 고수했다. 물론 그가 1943년 피델리티 인수 후 주가 조작, 과다 수수료 청구가 횡행하는 초기 주식시장의 복마전에 초연했던 것은 아니지만.

50, 60년대 뮤츄얼펀드 판매고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피델리티는 운용에 제리 차이, 판매에 콘펠드를 앞세워 당대 ‘빅3’ 운용사를 제치고 1위에 올라섰다. 하지만 주식시장 호황세가 한풀 꺾인 60년대 후반, 펀드 산업은 에쿼티 펀딩 사기사건을 비롯해 갖은 추문에 휩싸였다.

흔들리는 피델리티 호의 키를 잡은 건 에드의 외아들 네드였다. 이미 아버지의 회사에서 뛰어난 운용 실력을 뽐냈던 네드는 MMF펀드 호황을 발판으로 피델리티를 변모시켰다. 피터 린치라는 걸출한 매니저를 발굴했고, 전화 판매를 도입해 수수료를 대폭 낮춘 펀드를 팔았다. 베텔슨은 철저한 언론 관리와 광고 전략으로 이 회사를 보수 중산층 가치를 대변하는 기업으로 분칠했다.

그러나 네드의 피델리티는 보스턴 사설 관재인의 정신을 잃은 지 오래였다. 스타급 매니저들이 ‘정크본드의 황제’ 마이클 밀켄과 유착했다가 공멸해 고객에 피해를 안겼다. 만회하고자 벌처투자(부실기업 자산을 매입해 구조조정으로 고수익을 내는 투자)에 뛰어들었지만 수익에 비례해 신뢰를 잃고 말았다. 그 사례로 책머리에 상술된 ‘카이저 스틸 스캔들’에서 네드는 종잡을 수 없는 저승사자처럼 비친다.

저자는 87년 10월 주가 대폭락 사태의 책임을 피델리티의 분별없는 주식 투매에 묻기도 한다. “독재적인 한 남자의 개인 제국”. 이것이 ‘펀드 공장’으로 전락한 이 거대 글로벌 운용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냉철한 시선이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