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짜
올 추석은 열흘에 육박하는 연휴를 보내는 회사가 많다 한다. 길어진 연휴만큼이나 대목을 노리는 추석영화들도 각양각색이다. 특히 한국영화 기대작들이 흥행 왕좌를 두고 각축전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치열한 추석 흥행 전쟁에 나설 다섯 편의 한국영화를 골랐다.

<타짜>
인생을 판돈 삼은 꽃들의 전쟁
감독 최동훈 | 출연 조승우, 백윤식, 김혜수, 유해진
| 장르 드라마 | 시간 139분

오랜만에 해후한 친지들과의 의례적인 안부 교환이 끝나고 그 밥에 그 나물인 명절 TV 프로그램에 이골이 날 무렵부터 담요 위에서는 '꽃'들의 레이스가 벌어진다.

<타짜>는 명절과 화투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두 요소의 궁합이 스크린 위에서 만난 영화다. 영화는 도박판 '뽀찌'로 우연히 화투판에 발을 들여놓게 된 청년 고니(조승우)가 전설의 타짜 평경장(백윤식)을 만나 기술을 전수받고 타고난 배포로 장안의 최고 타짜가 되기까지의 인생유전을 쫓아간다.

<범죄의 재구성>에서 날렵한 이야기의 묘미를 보여준 영민한 감독 최동훈은 다시 한번 '범죄'세계의 이면을 파고든다. 도박과 섹스, 의리, 영광, 몰락 등 <타짜>에는 대중영화의 쾌락을 보장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모여 있다. 영화 속 평경장의 대사처럼 "도박은 드라마고 예술"이지만 한 끗발 차이로 인생 종치는 지름길이고 패가망신이 될 수도 있다.

<타짜>는 '꽃들의 전쟁'이라는 화투의 풀이말이 말해주듯, 외견상 화려해 보이는 도박판의 이중성을 조망한다. 자본주의적 인간형의 극단을 볼 수 있는 도박판을 무대로 속임수와 구라, 배짱으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타짜들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범죄의 재구성>에서 확인된 바 있는 다중 캐릭터들의 활약은 <타짜>에서도 여전하다. 득도의 경지에 다다른 고수 평경장 역의 백윤식, 현란하고 구성진 말빨로 좌중을 압도하는 고광렬 역의 유해진, 잔인무도한 타짜 '아귀' 역의 김윤석 등 조연들의 뒷받침도 훌륭하다.

배우들 외에도 <타짜>는 장인들의 손길이 느껴지는 영화다.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만화가라 할 수 있는 허영만의 원작만화를, <범죄의 재구성>으로 대중적 장르영화의 모범을 제시한 천부적 이야기꾼 최동훈이 각색했고, 화투판을 풍미한 실존 타짜 장병윤이 기술고문으로 참여했다.

오랜 취재와 체험을 살린 시나리오는 현장감이 넘치고 '섯다'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관객이 보더라도 무리 없이 녹아들 수 있는 세심한 연출이 돋보인다.

<라디오스타>
라디오의 스타, 라디오가 스타
감독 이준익 ㅣ 출연 박중훈, 안성기, 최정윤, 노브레인
| 장르 드라마 | 시간 115분

▲ 라디오 스타

감동의 크기와 묵직함만 보자면 <라디오 스타>는 추석 한국영화 중 으뜸이다.

<왕의 남자>에 이어 루저들의 삶에 대한 이준익 감독의 애정은 여전하다. 세상의 주류는 아니지만 인간의 향기를 잃지 않는 가치 있는 실패자의 삶. 1,230만 관객을 동원한 <왕의 남자>에 이어 <라디오 스타>가 보여주는 힘이 있다면 이것이다.

왕년에 잘 나가는 록가수였으나 지금은 남루한 지방 방송국 DJ가 된 남자 최곤(박중훈)과 그를 곁에서 지켜주는 매니저 박민수(안성기)의 이야기다. 폭행, 음주, 약물 등 최곤의 악행에 넌덜머리가 날 만도 하지만 민수의 애정에는 변함이 없다.

기행을 일삼는 퇴락한 록스타와 그의 후원자 이야기를 다룬 <러브 액츄얼리>의 한 에피소드를 연상시키는 이 영화의 중심에는 안성기와 박중훈 콤비가 있다. <칠수와 만수>를 시작으로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는 두 사람은 7년 만에 끈끈한 관계의 매니저와 가수로 절정의 앙상블을 보여준다.

<라디오 스타>는 이제는 사라져가는 ‘인간관계’의 일면을 보여주며 지난 날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기적이고 계산적으로 변하는 오늘날의 관계를 생각할 때 최곤과 박민수의 관계는 비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것은 안성기-박중훈이라는 나이든 콤비만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노래는 향수의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요소다. 가수와 매니저라는 등장인물의 직업도 무시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노래는 캐릭터의 감정을 실어 나르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

노래를 고르는 건 주인공을 섭외하는 것만큼 중요했다. 음악감독 방준석이 영화를 위해 만든 '비와 당신', 박민수의 18번으로 반복 등장하는 신중현의 '미인', 록밴드 이스트 리버가 부르는 '아름다운 강산', 조용필의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버글즈의 'Video Killed Radio Star', 시나위의 '크게 라디오를 켜고', 김추자의 '빗 속의 여인', 들국화의 '돌고 돌고 돌고', 김장훈의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브레인의 '내게 반했어' 등 심금을 울리는 주옥편들이 귓전을 맴돈다.

<구미호 가족>
춤추고 노래하는 여우 가족들
감독 이형곤 | 출연 하정우, 주현, 박준규, 박시연, 고주연
| 장르 뮤지컬 코미디 | 시간 104분

<구미호 가족>은 모험적인 영화다. 올 추석에 가장 주목할만한 '다크호스'를 꼽으라면 역시 <구미호 가족>에 표를 던지겠다.

'뮤지컬'이라는 한국영화계에서 불모지에 가까운 장르에 던진 과감한 도전장이 그러하고, '인간 변신'의 일념 하에 천년을 인고한 구미호 가족의 사연을 담은 이야기의 뼈대가 그러하다.

변변한 스타 캐스팅 하나 없이 탄탄한 프로덕션과 신인감독의 패기로 돌파하려는 야심은 보통을 넘는다. 노래와 춤이 나온다고 해서 뮤지컬로만 보기 힘들고 간간이 터지는 폭소를 근거로 코미디로만 치부하기도 힘들다. 영화는 편견을 깨고 자신의 길을 간다.

먼저 한국의 대표 전설 속 주인공인 구미호에 대한 편견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한 서린 죽음의 사연을 지닌 꼬리 아홉 달린 여우는 환골탈태에 가까운 변신을 보여준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지만 어수룩한 가부장(주현)과 남자 홀리는 재주를 타고 났으나 얼굴값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첫째(박시연), 부전자전 바보 하모니를 보여주는 둘째(하정우), 속내를 알 수 없는 막내 구미호(고주연)까지. 캐릭터 드라마의 묘미를 한껏 살리면서 오버와 억지웃음을 강요하지 않는 담백함이 <구미호 가족>의 진가다.

여러 장르가 결합되기는 했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요소는 역시 뮤지컬이다. 복숭아 프로젝트가 작업한 8곡의 창작, 편집곡이 얹어진 뮤지컬 장면은 어색한 수준을 넘어섰고 판타지 분위기를 한껏 살린 미술 역시 볼거리다.

특히 구미호 가족이 기거하는 서커스장 세트는 프로덕션의 힘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군산에 지어진 180평 세트, 거대한 공간에 구미호 가족의 남은 비밀이 숨어 있다. <파이널 판타지>, <히노키오>를 연출한 일본 감독 아키야마 다카히코가 구미호의 둔갑술과 환상적 움직임을 실현할 비주얼 슈퍼바이저로 영입됐다.

▲ 구미호 가족(좌), 가문의 부활 - 가문의 영광 3

다양한 제작 요소들의 조화를 긍정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역시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의 진정성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이 되기를 열망했으나 인간의 육체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깨닫게 되는 여우 가족들의 모습에서 그 진심을 확인할 수 있다.

<가문의 부활-가문의 영광3>
영광이여, 다시 한 번
감독 정용기 | 출연 김수미, 신현준, 김원희, 탁재훈, 신이
| 장르 코미디 | 시간 123분

명절에 통하는 영화는 따로 있다는 영화계의 속설은 허언이 아니다. <조폭마누라>, <가문의 영광> 등 머리를 비우고 볼 수 있는 조폭코미디는 명절 흥행의 대표 장르 역할을 해왔다. <가문의 영광>, <가문의 위기>에 이은 ‘가문 시리즈 3탄’ <가문의 부활-가문의 영광3>(이하 <가문의 부활>)는 공인된 추석 흥행 보증수표의 자리를 이어가려 한다.

검사 맏며느리를 맞아 암울했던 지난날과 결별한 백호파 일가는 가문의 지주인 홍덕자 여사(김수미)를 브랜드로 내세운 '엄니손 식품'을 런칭해 새로운 중흥기를 맞는다. 엄니손 김치로 요식업계를 풍미하던 엄니손 식품에도 <가문의 위기>에서 진경(김원희)을 사이에 두고 장남 인재(신현준)와 줄다리기를 했던 전직 검사 봉명필(공형진)의 출현으로 암운이 드리운다.

<가문의 부활>에 뭔가 새로운 재미를 기대한다면 당신을 경칠 게 분명하다. 하지만 1, 2 편에서 당신을 웃게 만들었던 그 정도의 재미를 원한다면 만족할 것이다. <가문의 부활>은 정확히 딱 그만큼의 웃음을 끌어내기 위해 골몰했다.

연타로 터지는 웃음을 위해 영화의 어떤 요소도 희생할 수 있다는 사명감에 불탄다. 어느 대목에서는 전편에서 웃음이 터졌던 순간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길게 늘여놓은 듯한 인상마저 받는다.

<가문의 위기>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인재와 진경의 과거 회상 장면은 삼형제와 백호파 창립자이자 형제들의 아버지인 장 회장(김용건)까지 등장시키는 백호파 일가의 과거 회상으로 확대재생산됐다. 웃음의 재료는 섹슈얼한 농담과 허무 개그, 자학, 피학 개그 등이다.

<가문의 위기>에서 가장 농밀한 웃음의 진원지였던 차남 석재(탁재훈)의 비중도 몰라보게 커졌다. '탁사마'로 불리는 탁재훈의 능글맞은 재담은 영화의 성패를 좌우할 요소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막대하다.

조폭 출신의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무뇌아라는 건 영화의 설정만은 아니다. 즐기기 위해선 관객들 역시 머리를 비워야 한다.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거나 운명적인 갈등의 상황은 추석에 어울리지 않는다.

▲ 무도리

<무도리>
할배판 <마파도>
감독 이형선 | 출연 박인환, 최주봉, 서희승 서영희
| 장르 코미디 | 시간 100분

<무도리>는 촬영 단계부터 <마파도>와의 비교를 피할 수 없었다. 촬영 단계부터 ‘할배판’ <마파도>라는 얘기가 돌았고 ‘이번엔 수상한 할아버지들이 몰려온다’는 카피와 포스터, 엽기 할아버지들의 좌충우돌 코미디로 포장한 마케팅 역시 굳이 유사성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자살하기 좋은 ‘자살 명당’이 있는 강원도 두메산골 무도리. 가진 거라곤 맞춤 자살 투신 바위밖에 없는 이 두메산골에 모질게 살아온 삶을 등지려는 자살희망자들이 넘쳐나기 시작한다. 남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연명하려는 무도리 할배 3인방 봉기(박인환), 해구(최주봉), 방연(서희승)은 자살여행자 유치작전에 돌입한다.

<무도리>가 떠올리게 하는 영화는 <마파도>가 다는 아니다. 외딴 장소에서 죽음을 매개로 벌어지는 내밀한 소동극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조용한 가족>이 떠오르고 <자귀모>, <자살관광버스>, <자살클럽> 등의 자살을 소재로 한 영화들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길이 없는 마을(無道里)’ 또는 ‘도리가 없는 마을(無道理)’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무도리는 인간사의 아이러니를 담은 코믹한 드라마다. <무도리>는 연간 자살자가 1만 명에 달하는 ‘자살 권하는 시대’의 초상을 다룬다.

극중 자살 동호회 ‘영원한 휴가’ 회원들의 사연도 구구절절 기구하기 이를 데 없다. 기러기 아빠가 된 가장의 허무함, 취업난에 시달리는 박사, 집안의 반대에 이루지 못할 사랑을 하고 있는 연인 등 한국 사회의 현재 모습을 슬쩍 얹어 ‘동시대성’을 얻는다.

무엇보다 <무도리>의 핵심에는 박인환, 최주봉 등 중견의 관록과 <마파도>의 ‘끝순이’ 서영희의 능청맞은 연기가 이루는 조화가 있다.

<웰컴 투 동막골>을 찍었던 세트를 재활용한 절약정신이 돋보이는 <무도리>의 비기에 대해 이형선 감독은 ‘뒷맛이 개운한 웃음’과 ‘훈훈한 감동’이라고 말한다. “억지로 웃음을 구걸하는 값싼 코미디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주연 배우 서영희의 자부심 어린 일성(一聲)에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