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엉겅퀴

날은 선선하고 대지는 풍성해 더할 나위없이 좋은 계절이다. 대기의 기운은 차지도 덥지도 않아 상큼하고, 산과 들에 익어가는 열매들은 그것이 먹을거리이든 아니든 다음 세대를 기약하는 풍요의 징표이니, 그저 가을을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하다.

이즈음 산정에 오르면 맑은 산 기운을 한몸에 받으며 곱고도 강인하게 피어있는 꽃을 볼 수 있다. 바로 고려엉겅퀴이다. 한가위를 보내며 고려엉겅퀴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이름도 특별한 이 식물의 의미있는 여러 모습 때문일 게다.

먼저, 단풍이 물들어가는 산에서 고려엉겅퀴를 만나면 꽃도, 열매도 함께 볼 수 있다. 그 모습은 지난 여름날 열심히 수고한 흔적과 더 이상 원색의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운 가을산과 아주 아름답게 어우러져, 고고한 계절의 이미지와 잘 맞아 떨어진다.

더욱이 꽃은 나무가 하늘을 가리지 않는 산정에 무리지어 핀다. 땀흘려 등정한 후 바위에 걸터앉아 쉬면서 눈앞의 황홀한 추색(秋色)을 가슴에 담을 즈음 꽃이 눈에 띄니, 기억의 창고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다.

하나 더 보태 의미를 찾자면 이 식물의 쓰임새이다. 우리는 이 고운 꽃을 고려엉겅퀴라 하지만 정선을 중심으로 하는 강원도 사람들은 곤드레나물이라고 부른다.

그럼 혹시 나물밥으로 먹는 그 식물? 그렇다. 강원도를 여행하노라면 식당 곳곳에 ‘곤드레밥’이라고 써붙여 놓고 자랑하는 별미가 바로 고려엉겅퀴의 어린 잎으로 만든 음식이다. 이 나물로 밥지어 먹는 때는 익은 봄이다. 하지만 한가위 차례 지내고 비벼먹는 이런저런 나물밥 때문에 그게 생각이 났는가 보다.

높은 산이 많은 동네에서 먹을 수 있는 이 나물은, 쌀 위에 얹어 밥을 지은 후 양념장과 함께 쓱쓱 비벼 먹는다. 맛이 부드럽고 영양도 풍부하다. 부인병에 효과가 있고 혈액순환을 좋게 하니 성인병 예방에 좋은 건강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곤드레나물이 바로 고려엉겅퀴라는 사실이 알려진 때는 오래되지 않았다. 특히 고려엉겅퀴 같은 국화과 식물은 어릴 때 뿌리 근처에 모여 달리는 잎과, 줄기가 한창 자란 후 달리는 잎 사이에는 크기와 모양의 차이가 있다.

몇 해 전, 누군가가 어린 잎들을 가져와 곤드레나물을 좀 키우려고 하는데 동내 이름이 아닌 학술 식물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심증적으로야 고려엉겅퀴라 생각되었지만 꽃을 보기 전에 식물명을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게 식물학자의 입장이라 선뜻 답하기가 어려웠다.

어린 잎 등 식물의 영양기관은 변이가 많아 정확하게 식물을 식별하는 특성이 되지 못하는 바, 식물학자로서는 심증만으로 대충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잎을 가져온 사람에게 고려엉겅퀴 사진을 보여주며, 이 식물이 자라면 이런 꽃이 피지 않느냐고 물어봐도 그들은 나물로 먹는 어린 잎만 기억하지 자란 후의 모습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이러저러한 곡절 끝에 곤드레는 고려엉겅퀴로 판명되었다.

왜 하필 곤드레란 별명이 붙었을까? 술에 취해 곤드레만드레한 술꾼 모습과 이 식물이 산정에서 자유분방하게 피어 있는 모습의 이미지가 닮아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정선아리랑에 "곤드레만드레 우거진 골로" 라는 가사가 있어 그 노랫말의 곤드레는 바로 고려엉겅퀴가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여전히 이 땅의 깨끗하고 높은 곳에서 청결하게 피고지는 그 꽃의 서늘한 자유로움이, 문득 부럽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