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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타운] 김대승 감독 '가을로'
사랑의 흔적을 좇아 상처를 지워가는 悲歌

멜로드라마는 포용력이 큰 장르다. 남녀의 시시껄렁한 연애담이라고 평론가들에게 하대 받을지언정 동서고금의 어떤 장르도 멜로를 차용하지 않은 영화는 드물다. 장르와 장르를 결합하고 서로 다른 지향과 세계관을 가진 관객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유연성이 수 천년간 서사예술의 대표 장르로 자리잡은 멜로드라마의 질긴 생명력의 원천이다.

<가을로>는 이 같은 멜로드라마의 광대한 지평을 확인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시도를 보여준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환생과 동성애라는 모티프를 죽은 연인에 대한 애절한 연심으로 치환한 김대승 감독은 <혈의 누>라는 장르적 모험을 거쳐 다시 한번 멜로드라마의 가능성을 시험한다.

아름다운 배경, 여행 욕구 자극

<가을로>를 여타의 멜로드라마와 구분 짓는 건 실화를 드라마의 전제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연인의 자취를 따라가는 가을 여행 <가을로>는 1995년 한국인들의 머리 속에 잊을 수 없는 공포의 인장을 새긴 '삼풍백화점 참사'를 이야기의 발단으로 삼는다. 장르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 온 역사적 기억은 이 영화의 장르성을 규정짓는 키워드이다. 결혼을 앞둔 여행전문 프로그램 PD 민주(김지수)는 변호사 최현우(유지태)와 사랑하는 사이다.

결혼을 앞에 둔 상황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민주가 세상을 떠난다. 삶의 희망을 잃고 냉정한 검사가 된 현우는 정, 재계가 연관된 불법 사기 분양 사건의 배후를 파헤치려 하지만 외압에 맞서지 못하고 휴직을 한다. 재활의 의지마저 꺾인 현우에게 민주의 아버지가 찾아와 유품이라며 다이어리를 한 권 건넨다.

그 속에는 민주가 여행을 다니며 기록한 여행지에 대한 기록들이 빼곡히 담겨 있다. 현우와의 신혼여행을 위해 남겨 둔 그 기록을 따라 현우는 치유의 여행을 떠난다. 삼풍 참사라는 무거운 분위기로 시작하지만 <가을로>는 여행의 욕구를 자극하는 계절영화다.

영화 자체는 멜로드라마지만 여정을 통해 성장과 치유를 말한다는 측면에서는 로드무비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에 하나밖에 없다는 우이도 모래사막에서 출발한 현우의 여정은 고즈넉한 풍경에 마음까지 가라앉는 담양의 소쇄원, 불상이 물 속에 비친다고 하여 사찰의 이름이 지어졌다는 울진 불영사, 인간의 상처를 보듬어줄 것 같은 영월의 동강을 경유해 굽이굽이 이어진다. 가을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장소들뿐 아니라 현우가 지나가는 다양한 '길'들은 그가 걸어왔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인생의 과정들을 은유한다.

임권택 감독 문하에서 8년간 연출부 생활을 거친 김대승 감독은 전국 각지 안 가본 곳이 없는 로케이션 전문가답게 아름다운 길과 장소들의 만찬을 선보이고 있다. 10개월간 전국 60여 개 장소를 떠돌이 생활을 하며 촬영한 한국 산수의 풍경들은 짐을 싸고 싶은 충동을 저절로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저 보기 좋은 비경들에 머물렀다면 <가을로>의 산수는 그리 깊은 공명을 낳지 못했을 것이다. 이 영화의 풍경들을 관광공사에서 발행하는 홍보엽서와 구분짓는 것은 그 수려한 자연 속에 담긴 인간 때문이다. 김대승 감독은 불의의 사건으로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남자의 상실감과 고통, 그리고 그의 상처를 쓰다듬고 정화시키는 자연의 너른 품을 과장하지 않는 어법으로 카메라에 담는다.

역사적 기억과 멜로의 결합 실험

사막에서 시작해 숲으로 끝나는 현우의 여정이 자연의 치유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역사적 기억을 치유하기 사실 <가을로>는 2001년부터 준비해 무려 5년의 시간이 소요된 영화다. 그리 오랜 제작 기간이 필요한 장르는 아니지만 시나리오가 완성된 후에도 감독이 몇 차례 바뀌었고 제작 여건이 여의치 않았던 탓이다.

난항을 겪었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소재의 부담감'이다. 세기말 한국사회의 불안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던 삼풍백화점 사고를 대중영화, 그것도 가장 통속화된 장르라는 멜로드라마와 결합시키는 것이 그만큼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풍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니었고 김대승 감독 역시 그런 부담감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불가항력적인 재난에 의해 연인을 잃은 남자가 여행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은 지극히 영화적인 설정이지만 원인과 결과가 있는 실재 사건을 엉뚱한 방향으로 굴절시킬 가능성도 컸다.

이런 영화들이 만들어지면 으레 나오기 마련인, '상업적인 악용'의 위험성이나 '사실 왜곡' 시비, 그리고 영화로 재현할 만큼 충분히 상처가 아물고 시간이 지났는가라는 '시점의 문제'까지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많기 때문이다.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어떻게 삼풍을 다뤄야 할지 내내 고민이었다"는 김대승 감독의 말은 절대 허언이 아니다. 하지만 <가을로>는 이런 류의 영화가 지켜야 할 '염치'를 저버리지는 않는다. 영화에서 풍경이 중요한 또하나의 이유가 여기 있다.

김대승 감독은 순리대로 흘러가게 모든 걸 놔두고 인간을 품어주는 자연의 법칙을 인간의 인위적인 손길에 의해 붕괴되고 만 저 '저주의 백화점'과 대비시킨다. 삼풍은 부질없는 인간의 욕심이 쌓아올린 바벨탑이고 부실한 토대와 기둥 위에 건설한 허울 좋은 한국 근대화의 흉물이었다. <가을로>는 침튀기며 그것을 비난하는 사회파 드라마가 되는 대신, 오만한 인간의 욕심을 깨닫게 만드는 대자연의 힘을 웅변적으로 전시하는 멜로드라마를 택했다.

그러므로 이 영화 속에 삽입된 풍경들은 단순한 눈요기를 위한 스펙터클은 아니다. 한편으로 그것은 현우의 팍팍한 마음의 안식이고 상실당한 연인의 추억을 환기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가을로>는 삼풍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착취'하지 않으며 불순한 의도로 사실을 왜곡하지도 않는다. 공공연히 알려진 역사적 기억을 멜로드라마라는 대중 장르 속으로 끌어들이는 만만치 않은 과제를 안고 시작한 이 영화의 모험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입력시간 : 2006/11/06 14:49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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