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는 다섯 개의 달 새벽 바다엔 붉은 해 둥실

전통적으로 아름답기로 이름 높은 경포대 일출.
백두대간의 큰 고개인 대관령을 넘어야 갈 수 있는 강릉은 바다와 어우러진 수려한 풍광과 유서 깊은 전통이 넘쳐나는 문향의 고을이다. 무엇보다도 지난해 11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단오제가 유명하거니와 오래된 역사만큼 많은 문화유산과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그래도 역시 경포대를 빼놓으면 섭섭하다. 낙엽이 휘날리는 늦가을, 관동팔경의 하나로 사랑 받던 경포대를 찾아 늦가을의 정취를 즐겨보자.

선교장·오죽헌 등 볼거리 풍성

경포대가 있는 경포호(鏡浦湖)는 동해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태양, 붉게 타오르는 석양, 달밤의 호수 풍광,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모래사장 등으로 이름 높은 호수다. 예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아름다움을 예찬한 곳으로 호수가 거울처럼 맑다고 하여 붙은 이름. 경호(鏡湖) 혹은 군자호(君子湖)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옛날엔 호수 둘레가 20리에 달했으나 오늘날엔 호수로 토사가 흘러들면서 면적이 줄어들어 10리(4.35km)에 지나지 않는다. 아쉽긴 하지만 산책하기엔 적당한 거리가 아닐 수 없다.

잘 나갈 땐 호수 주위에 12개의 정자가 있었으나 현재엔 경포대(鏡浦臺), 금란정(金蘭亭), 방해정(放海亭), 해운정(海雲亭)만이 남아 있다. 이 중 경포호 서쪽 언덕 위에 다소곳이 자리잡고 관동팔경의 하나로 이름 날려온 경포대는 조선의 문장가인 송강 정철(鄭徹)의 매우 서정적인 기행문인 <관동별곡>으로 알 수 있듯 시인 묵객들에게 크나큰 사랑을 받아온 곳이다.

당시 풍류객들은 달이 뜨는 밤이면 이 경포대에서 다섯 개의 달을 보며 즐겼다. 하늘에 떠있는 달, 출렁이는 호수 물결에 춤추는 달, 파도에 반사되어 어른거리는 달, 정자에서 벗과 나누어 마시는 술잔 속의 달, 벗의 눈동자에 깃든 달…. 그럴 때면 마

늦가을 분위기 물씬 풍기는 허난설헌 생가.
음도 달떠 가을 정취는 곱절이 되곤 했다.

호수에서 남쪽으로 1km쯤 떨어진 아름드리 해송 숲엔 조선 시대에 중국에까지 필명을 드날렸던 천재 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의 생가가 남아 있다. 난설헌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의 누이로서 이름은 초희(楚姬)고, 난설헌은 호다.

그녀는 8세에 상량문을 지어 신동이라는 칭송을 받고, 동생의 문장을 고쳐줄 정도로 출중한 솜씨를 지녔으나 14세에 결혼해 두 딸을 잃고 시름에 찬 세월을 보내다 27세에 요절했다. 초당동 허난설헌 생가 들어가는 길 곳곳엔 ‘허초희시비’를 비롯해 당대 허 씨 5문장을 기리는 시비를 세워져 문학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허난설헌 생가는 소나무와 벚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전통 가옥의 운치가 제법 넘친다.

경포호를 찾았을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선교장(船橋莊, 중요민속자료 제5호)이다. 경포호 서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선교장은 조선 후기 영동 지역 상류층의 주거 생활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선교장은 ‘배다릿집’이라는 뜻인데, 이는 경포호의 물이 이곳까지 차 있을 때 배가 드나들던 옛 지명인 ‘배다리마을’에서 유래한 것이다. 안채, 그리고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 별채인 동별당이 있다.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가운데 ‘친척들과 더불어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즐긴다’는 구절에서 따왔다. 선교장 연못엔 1816년 활래정(活來亭)이 있다. 활래정은 주자의 ‘관서유감’이라는 시에서 ‘맑은 물은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에서 얻은 것이다.

오징어 잡이배 漁火도 장관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태어난 오죽헌(烏竹軒, 보물 제165호)은 주변으로 검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율곡이 탄생한 몽룡실(夢龍室)은 조선 초기의 건축물로 유명하다. 마당엔 오백 년된 목백일홍나무 한 그루가 있다. 율곡기념관엔 덕행과 지식을 함양하기 위한 입문서인 <격몽요결>(보물 제602호)과 신사임당

정철의 관동별곡 무대로 잘 알려진 경포대 정자.
의 글씨, 그림을 비롯해 맏딸 매창과 넷째아들 옥산의 서화 등 율곡 선생 일가의 유품들 6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대학자 율곡의 어머니면서 스승이기도 했던 신사임당의 자수, 서예 솜씨는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풀과 벌레를 그린 초충도(草蟲圖)에 능했는데, 워낙 솜씨가 정교해서 볕에 말리기 위해 마당에 내놓았더니 닭이 부리로 쪼아 종이에 구멍이 뚫렸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렇듯 정철의 관동별곡으로 이름 떨친 경포대를 찾아 허난설헌 생가와 선교장, 오죽헌을 둘러봤다면 얼추 돌아본 게 된다. 그러나 강릉에서 경포대 일출만큼 유명한 게 또 있을까. 강릉 구경 다했다 해도 경포대 일출을 빼놓으면 그래서 허전하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이 차가운 늦가을 바닷가의 새벽녘, 경포대 백사장으로 나간다. 어두운 바다엔 오징어잡이배의 불빛만 신기루처럼 떠있다. 얼마 후 동녘 하늘이 시나브로 밝아지더니 한순간 붉은 햇덩이가 불쑥 솟아오른다. 모래사장에서 서성이며 일출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오지만, 시샘하는 수평선의 구름이 이내 장막을 드리운다.

11월 중순의 경포대 일출 시간은 7시 5분쯤이다. 시시각각 색깔이 변하는 바다의 아름다운 광경을 감상하려면 늦어도 30분 전엔 도착해야 한다.

▲ 여행정보

숙식 경포호 주변의 해안가에 전망 좋은 숙박시설과 횟집이 즐비하다. 초당동은 바닷물을 간수로 쓴 ‘초당순두부’로도 유명한 마을이다. 초당할머니순두부집(033-652-2058), 옛날초당순두부집(033-645-0557) 등이 유명하다. 순두부백반(5,000원)이 가장 무난하다. 두부부침 5,000원, 생두부 4,000원.

교통 영동고속도로 강릉 나들목으로 나와 10분만 달리면 오죽헌, 선교장을 차례로 지나 경포대에 도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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