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샤프란 포어 作… 삶과 사랑과 진실의 총체

우리는 이미 오스카라는 이름의 소년을 알고 있다. 세상에 대한 경멸과 야유로 스스로 자라지 않는 삶을 선택한 영원히 늙은 소년 -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의 오스카.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세상의 부조리를 향해 미친 듯이 북을 두드리는 난쟁이 오스카는 영원히 잊히지 않을 소설 속의 캐릭터다.

여기 오래도록 기억될 또 한 명의 오스카가 있다. 미국의 젊은 작가 조너선 샤프란 포어(1977~ )의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주인공 오스카 셸. 오스카는 뉴욕에 살고 있는 아홉 살 소년이다. 반짝이는 호기심으로 하나하나 세상을 알아가던 소년은 ‘9·11테러’로 아버지를 잃고 만다.

소년의 세상은 완성되기도 전에 뒤죽박죽 헝클어져버렸다. 조숙하면서도 엉뚱한, 그런가 하면 더없이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소년 오스카는 자신의 상황을, 상처를, 슬픔을, 분노를, 의문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세상의 중심을 지켜주던 아버지가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오스카의 가족은 빈 관을 무덤에 묻었다.

“우주의 모든 것과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운 동시에 엄청나게 혼자인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난생 처음으로, 살기 위해 요구되는 그 많은 일을 다 해야 할 만큼 삶이 가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정확히 무엇 때문에 삶이 그만한 가치를 갖는다는 걸까? 영원히 죽은 상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꿈조차 꾸지 않는 그런 상태가 뭐 그리 끔찍하다는 걸까? 느끼고 꿈꾸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할까?”

오스카는 공상으로 온갖 희한한 물건들을 발명하고, 탬버린을 연주하고, 동전을 모으고, 억지로 심리치료사를 만나고, 제인 구달과 스티븐 호킹에게 자기를 조수로 써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지하철과 엘리베이터 타는 일에 공포를 느끼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학교에서 공연하는 엉터리 <햄릿>에 단역으로 출연하고, 이웃아파트에 살고 있는 할머니와 무전기로 대화를 나

누고, 어머니의 새 남자친구에게 질투를 느끼고 심술을 부린다. 그러다 아버지의 유품 속에서 수수께끼처럼 발견한 열쇠 하나를 목에 걸고 그 열쇠가 어떤 자물쇠를 여는 열쇠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다음 (그러나 결국은 무모하게) 길을 나선다.

소설에는 또 다른 화자들이 등장한다. 바로 오스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다. 이들의 삶은 더욱 복잡한 상처들로 일그러져 있다. 2차 대전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오스카의 할아버지는 고향인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폭격을 당해 모든 것을 잃는다. 그가 실어증에까지 걸리게 된 것은 바로 첫사랑의 소녀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채 폭격 속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조각가를 꿈꾸었던 그는 미국으로 건너와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채 살아간다.

그는 양 손바닥에 문신을 새겨 넣은 ‘예’와 ‘아니오’로 사람들과 대화한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첫사랑 소녀의 여동생을 만난다. 언니와 그와의 사랑을 알고 있던 여동생은 그가 상처를 극복하고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와 결혼한다. 그 여동생이 바로 오스카의 할머니다. 서로를 원하면서도 서로를 거부하는 결혼생활이 이어지고, 아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도 사랑도 상처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느낀 남편은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흐른다. 할머니는 어린 손자 오스카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할아버지는 자신이 외면한 아들(오스카의 아버지인 토마스)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지나간 시간과 삶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보내지 못할, 받지 못할 편지들이다.

예의 열쇠가 무엇을 여는 열쇠인지 알아내기 위해 아홉 살의 오스카는 거대한 도시 뉴욕의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닌다. 아버지가 남긴 열쇠는 ‘블랙’이란 이름이 씌어진 작은 봉투 안에서 발견되었다. 단서는 그것뿐이다. 오스카는 뉴욕에 살고 있는 모든 ‘블랙’들을 만나려 하는 것이다. 오스카는 숱한 블랙들을 찾아간다. 그들은 오스카의 아버지를 모른다. 열쇠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어린 오스카에게 각자 자신의 얘기를 들려준다. 오스카는 그들 역시 자신처럼 나름의 사랑을, 상처를, 모순을, 기쁨을, 슬픔을, 우주를 품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좋은 소설은 삶을, 사랑을, 진실을 총체적으로 드러낸다. 부분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은 결국 전부를 말하게 된다.

어린 소년이 아버지를 잃었다. 그 혼돈과 슬픔. 진정한 사랑을 키워갈 수 없었던 부부가 있었다. 그 상처와 회한. 세계 최고의 도시의, 세계 최고의 빌딩이 테러로 인해 무너져 내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문을 모른 채 고귀한 목숨을 잃었다. 그 모순과 부조리. 그 사건의 진실은 반드시 그 사건의 경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 인간이 죽는다 해도 그 한 인간이 이루고 있던 모든 것이 죽는 것은 아니다. 삶과 사랑과 진실은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생명은 죽음 뒤에도 여전히 생명을 남긴다. 살아남은 모든 자들이 그것을 안다.

테러가 일어났던 날, 학교에서 일찍 집으로 돌아왔던 오스카는 무너져가는 세계무역센터 빌딩에서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온 아버지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자동응답기 속의 아버지가 몇 번이나 자신을 찾았음에도 오스카는 전화기를 집어 들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탄생을 부정했던 아들이 테러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대서양을 건너 집으로 돌아온다. 수십 년 동안 아들에게 부치지 못했던 무수한 편지를 안고 늙어버린 아내 곁으로 돌아온다. 열쇠에 얽힌 수수께끼 자체는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깊은 밤 할아버지와 손자는 아버지의 빈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오스카는 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편지를 받는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씌어 있다.

“광대무변한 우주 대부분이 암흑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얘기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우리가 결코 볼 수도, 들을 수도, 냄새 맡을 수도, 맛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들이 깨지기 쉬운 균형을 좌우합니다. 그것이 삶 자체를 좌우합니다. 무엇이 진짜일까요? 무엇이 진짜가 아닐까요? 어쩌면 이런 질문은 하지 말아야 할, 옳지 않은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삶을 좌우할까요?”

삶과 사랑과 진실은 위대하다. 그것은 모순과 부조리, 고통과 슬픔, 불가해한 운명의 상징들로 가득 찬 ‘암흑 물질’이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든 것을 좌우한다. 오스카의 할머니가 말한다.

“너에게 지금까지 전하려 했던 모든 이야기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란다, 오스카. / 그 말은 언제나 해야 해. / 사랑한다, / 할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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