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울지 않는다

한 시인은 인터넷 없이는 아예 생존이 불가능해 보이는 요즘의 젊은 세대에게 ‘관음증인 동시에 노출증’이란 진단을 내렸다. 물론 충분히 수긍이 가는 분석이다. 그러나 그것은 혀를 끌끌 차고 마는 데 그칠 문제가 아니다. 각종 부작용과 폐해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은 이미 젊은 세대에게 물이나 공기 같은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물이나 공기만큼의 생명력은 아니라 해도 이제 어지간해서는 인터넷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그저 인터넷의 ‘편리’나 ‘정보’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 자신을 감추는 것, 타인을 살펴보는 것, 그것을 통해 타인을 판단하는 것 - 우리가 매일같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미묘한 소통의 문제들이다. 그 문제들은 인터넷상에서도 물론 존재한다. 현실에서보다 더욱 미묘하고 더욱 복잡한 모습으로.

여기 한 ‘어른여자애’가 있다. 대부분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어린아이가 존재하고 있는 어른여자애. 그것의 심리학적 의미 분석은 차치하고라도, 자신 안에 또 다른 자아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단 용기임이 분명하다. 그런 어른여자애의 일면을 인터넷을 통해 들여다본다는 것. 표현, 욕망, 진실, 왜곡, 이해, 오해, 존재. 그 사이에서 작용하는 ‘드러냄과 감춤’은 한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역시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녀의 이름은 정한별, 82년생, 부모와 떨어져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대학생.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은 이다(2da), 2001년부터 현재까지 5년째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www.2daplay.net)에 ‘그림일기’를 업데이트하고 있다. 미술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부터 지금껏 그림 그리는 일을 가장 좋아한다는 그녀는 <이다의 허접질>을 통해 차츰 세상에 알려져 현재 만화가로, 일러스트레이터로,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다의 허접질>은 이다의 개인홈페이지 이름인 동시에, 그녀 스스로 자신의 그림과 일기를 지칭하는 명칭이기도 하고, 또 그 그림과 일기들을 한데 묶어 발간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일기를 인터넷에 공개한다는 것 자체에 저의를 의심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엔 어떤 계산된 의도보다 열정과 불안이 공존하는 20대의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한 청춘의 자의식과 표현욕이 우선하고 있다. <이다의 허접질>은 기존의 잣대로는 그 성격을 규정하기 힘든 창작물이다. 이다라는 존재와 그녀의 그림과 일기는 미숙하고 거칠고 좌충우돌하는, 날것 그대로의 매력을 발산한다. 길들여지지도 다듬어지지도 않은 개성적인 필체로 이다는 자신의 일상을, 갈등과 고민을, 꿈과 사랑을 그려낸다. 이다가 온라인상에서 나름의 유명세를 치르게 된 것은 무엇보다 꾸밈없이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이다는 자신의 그림 속에서 항상 나체로 등장하며, 꺼려지는 소재들을 거침없이 과감하게 다룬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치기나 무책임한 객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다는 솔직함의 대가를 치른다. 그녀는 예의 ‘드러냄과 감춤’ 사이에서 누구보다 심각하고 진지하게 갈등한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결과들로 인해 상처를 받는다.

“솔직하게 보이기는 상당히 쉽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 힘든 생리라든지, 치질이라든지, 섹스라든지 그런 것들을 말하면 ‘정말 솔직하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정말 비밀을 숨겨둔 채 솔직하게 보이기. 나는 가식적이다.”

솔직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인간이 남에게 자신의 전부를 남김없이 보여줘야만 솔직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자신의 전부를 남김없이 보여준다는 것 - 그것은 무엇보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솔직함은 비밀의 고백, 그 자체가 아니다.

자신의 그림 속에서 이다는 과감하고 거침없고 직설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 이다는 수줍어하고 망설이고 더없이 내성적인 자신의 모습도 그림 속에 드러낸다. 이다는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상에 자신의 내밀한 그림과 일기를 공개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다의 모든 것을 알 권리는 없다. 이다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개할 의무는 없다. <이다의 허접질>을 통해 우리는 이다를 알 수 있지만, 이다를 알 수 없다. 이다 역시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지만 감출 수도 있다.

<이다의 허접질>이 우리에게 공감을 주고 또 나름의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여대생의 사생활을 훔쳐볼 수 있는 이상야릇한 그림일기여서가 아니다. 거기엔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하고 또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어 하는 한 청춘이 실망하고 좌절하고 분노하고 아파하는 모습이, 기뻐하고 희망하고 꿈꾸고 사랑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난 요즘 어떡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어떤 사람은 나보고 ‘그림’으로 성공하고 싶으면 기초를 닦으래. 또 어떤 사람은 정규교육을 받고 기초를 닦으면 그림의 특색이 없어질 거래. 또 어떤 사람은 학교를 그만 두래. 또 어떤 사람은 그래선 안 된대. 난 요즘 무슨 장단에 맞춰서 춤춰야 할지 모르겠어. 물론 내가 좋아하는 장단에 맞추고 싶지만 그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어. 그리고 꼭 춤을 춰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꼭 춤을 춰야 한다면 내가 장단을 직접 고르고 싶은데, 난 그런 능력은 없다구. 누가 <예술가로 성공하려면 이 책 보고 따라 해라> 같은 책이나 냈으면 좋겠다.”

청춘의 삶은 그야말로 갈팡질팡이다. 세상에 대한 불만과 두려움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다는 전진한다. 처절하게 눈물을 흘리는 일그러진 얼굴을 그리기도 하고, 감당할 수 없는 상처로 홈페이지를 닫기도 하고, 책을 출간한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홈페이지를 열어 새로 업데이트를 하고, 나무와 늑대와 기린의 그림을 그리고, 프로로서 전시회에 참가한다. 그러한 퇴행과 성장을 반복하며 어른여자애 이다는 5년째 자신의 삶을 표현하고 창조하고 있다.

책의 표지에서 이다는 울고 있다. 그러나 소녀는 울지 않는다. 언젠가 어른이 되어, 끝내 울지 않기 위해, 지금, 울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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