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손 성원식(成元植) 씨 통신회사 수석연구원… 종택은 한국전쟁 때 불타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 하면 먼저 ‘선풍도골(仙風道骨)’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이제 무협지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인물평을 들어보기 어렵다. ‘남달리 뛰어나고 고아한 풍채’를 뜻하는 이 평은 최고의 존경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선조(宣祖) 대의 유교칠신(遺敎七臣, 선조가 승하할 때 遺命을 내릴 정도로 신임하던 일곱 신하) 중 한 사람인 박동량(朴東亮)이 지은 기재잡기(寄齋雜記)에 보면 이런 일화가 있다.

홍정(洪正)은 우의정 성세창(成世昌, 성현의 아들: 1481-1548)과 서로 통하는 친구였다. 그가 정월 어느 눈 내린 날 밤에 친구를 찾아가 동원(東園) 별실 한가한 창 아래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중 뜰 가에서 거문고 소리가 들렸다. 창 틈으로 가만히 내다보았더니 백발을 휘날리는 한 노인이 매화나무 밑에 눈을 쓸고 앉아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그 손 끝에서 울려 나오는 청아한 소리가 매우 기이하였다.

성세창이 자신의 부친이라고 말한 노인은 어느새 손님이 방에 있는 줄 알았는지 서둘러 거문고를 거두어 들어갔다. 이 장면을 보고 홍정은 친구에게 “달빛은 대낮 같고 매화가 활짝 핀 바로 그때 백발이 흩날리고 맑은 가락이 그 사이로 발산되었는데, 아득히 신선이 내려온 것처럼 상쾌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듯하니, 용재 성현이야말로 신선의 풍채와 도사의 기골을 가진 분이라 하겠다”라 말했다. 여기에서 ‘선풍도골’이라는 문자가 나오는데, 정황을 함께 보여주어 실감이 난다.

다른 기록에는 허백당이 바둑의 고수라고 묘사되어 있어 그 평가에 더욱 믿음이 간다. 실제로 허백당은 성종9년(1478) 11월 국왕에게 상소하면서 ‘국왕이 이전의 잘못된 역사를 알면서도 그러한 전철에 빠지는 것은 비유하자면 바둑을 구경하는 자는 승부를 알 수 있으나 대국자는 막연해 어쩔 줄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신하로서 그런 비유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종손 성원식 씨
허백당은 몰년을 기준으로 볼 때도 500년 전 인물이다.

20대나 가문의 맥을 이어와 유구한 역사가 500년을 넘어섰다. 그래서 허백당 종택은 고가(古家)요 세가(世家)다. 그래도 맛이 부족하여 앞에다 무엇을 덧붙일까 생각해 보았다. 일감은 ‘문학(文學)’이다. 허백당은 타고난 문장가요 시인이었다. 당시 누구보다도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시로 승화해 작품으로 남겼다. 연구자들은 이를 ‘국속시(國俗詩)’라 분류했다.

그 다음은 ‘음악(音樂)’이다. 조선 시대에 어떤 인물을 음악가라 규정짓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나라 음악을 집대성한 큰 공을 남겼다. 그 결과물이 유자광과 함께 편찬한 악학궤범(樂學軌範)이다. ‘악학’이란 ‘음악학’의 준말. 이 책은 조선시대 음악의 지침이 된 유일한 악전(樂典)이다.

허백당의 20대 종손 성원식(成元植, 1967년생) 씨를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벤처빌딩에서 만났다.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에서 태어난 종손은 5세 때 부친을 따라 경기도 안양으로 이사했다.

중견 통신회사의 수석연구원 명함을 가진 종손은 안양중·고를 거쳐 연세대학교 전자공학과(87학번)를 졸업했다. LG중앙연구소에서 1993년부터 2001년까지 근무한 뒤 현재의 직장으로 옮겼다. 93년 진주 강씨와 결혼해 슬하에 필준(必晙·11세), 현준(鉉準·7세) 형제를 두었다.

선대 종손인 성연홍(成演洪, 1939년생) 씨는 건국대학교에서 수학했고, 사업을 하다 철도청에 들어가 퇴직한 뒤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

성현 묘비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종손의 부친은 가문 의식이 남달랐다. 그래서 문중을 일으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때로는 의견이 다른 지손들과 대립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종손이 시제 등 문중 행사에 빠짐 없이 참여하는 것은 부친으로부터 받은 가르침 때문이다.

허백당의 종가는 경기도 문산읍 내포리에 있었다. 종손의 기억으로는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거주하다 자신이 고교 3학년생이었을 무렵에 돌아가셨는데, 부리던 사람들의 집도 당시까지 남아 있었다 한다.

고서와 고문서가 가득했던 원래의 기와집은 한국전쟁 중에 불타 없어졌다. “구전에 의하면 불순 세력들이 고의로 불을 질렀는데, 당시 주위 사람들이 많은 자료를 가지고 나갔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두 불탔겠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나마 다행한 일입니다.”

묘소가 있는 그곳은 황희 정승 묘소와 가깝다.

LCD파주 공장이 그 너머에 자리잡고 있다.

종손의 몸에는 가문의 역사나 범절이 배어 있다.

1997년 문화관광부에서 ‘이달의 문화인물’로 허백당이 선정되었을 때 다양한 행사를 마련해 할아버지를 기리고 알렸다. “제가 어렸을 때 저를 차종손이라고 어른들께서 존대말을 써주셨던 일이 생각납니다. 시제를 지낼 때면 저보고 향(香)만 안고 있으면 된다고 했어요. 요즈음은 제 나이가 가장 젊으니까 제수를 옮긴다든지 하는 일을 솔선해서 열심히 합니다.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전통 반가에서는 종손이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종손을 높이는 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종손이 모시고 있는 조상을 높이는 것이며 그것이 결국은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종가 사람들 또한

용재총화
엄격한 문중 교육을 받아 스스로 존엄성을 지켰다. 일부 문중에서는 독선생을 초빙, 체계적인 교과 과정을 통해 종손을 교육하기도 했다.

기제사에 대해 물었다. “저는 위패를 모시지 않아서 지방을 쓰는데요, 컴퓨터로 출력합니다.” 조부는 4형제, 선친은 외동이었다. 당숙이 4명 있어 그나마 고적하지는 않다고 한다. 불천위로 모시지 않기 때문에 선대 기제사만 모시는 종가의 제사에는 제관이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이어서 전공인 통신 분야에 대한 이야기로 옮겼다.

광전송장비 등 전문용어와 함께 현황과 전망까지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그 분야의 앞날에 대해 우려도 털어놓았다. 가만히 듣다보니 분야만 다를 뿐이지 선현들이 시대를 걱정했던 ‘우환의식(憂患意識)’이 종손에게도 있는 것을 느꼈다.

종손은 문중사(門中史)도 꿰고 있었다. “저희 집은 셋째 집이 잘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허백당 할아버지가 셋째, 그리고 돈재(遯齋) 성세창(成世昌:1481-1548)도 셋째입니다.

선영에 모신 묘비를 보면 6·25 때의 총알 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안경 너머로 젊은 종손의 자긍과 자손으로서의 도리를 자임하는 마음이 읽혀졌다. 남을 포용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진 종손이다.

▲ 성현 1439년(세종21)-1504년(연산군10)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경숙(磬叔) , 호는 허백당(虛白堂), 부휴자(浮休子), 국오(菊塢), 용재(慵齋), 시호는 문대(文戴)
글씨·음악에도 능한 문장가… '' '악학궤범' 등 대작 남겨

허백당을 쓰면서 인물 관련 사료가 너무 많아 행복한 고민을 했다. “1호 크기의 작은 유화에다 인물 누드를 그리기가 정말 어렵다”고 유명 서양화가가 고백한 적이 있다. 허백당의 관련 자료를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어느 길로 들어서야 목적지까지 제대로 갈 수 있을까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날도 저물었다.

허백당 성현은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문장가다. 그와 동시대에 함께 빛을 발한 이가 허백정(虛白亭) 홍귀달이다. 홍귀달은 허백당보다 한 살 많은데 흥미로운 점은 허백이라는 호를 함께 쓰고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이력을 보면 숫제 닮은 꼴이다. 같은 해에 진사시에 합격한 두 사람은 1년이란 시차를 두고 24세에 문과에 급제한다.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로 나란히 여러 관직을 역임한 두 사람은 허백정이 먼저 문학하는 신하의 최고 명예였던 대제학에 올랐고 허백당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6개월의 시차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다만 홍귀달은 연산군에 의해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교살된 데 비해, 두 달 뒤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에게는 부관참시라는 극형이 내려져 무덤이 훼손되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성현이 남산 중턱에 지은 홍귀달의 정자인 허백정 기문을 쓰면서 극구 허백(虛白)의 의미를 강조한 것을 통해 두 사람의 교감을 알 수 있다.

성현의 학문 계통은 삼봉 정도전, 양촌 권근, 춘정 변계량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원류는 고려 삼은 중의 한 분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에 있다. 그의 뒤를 태재 류방선이 이었고 괴애 김수온, 성현의 중씨(仲氏)인 성간, 성현으로 계승되었다. 성현은 다시 기묘명현(己卯名賢)인 모재 김안국에게 이었고, 초당 허협이 모재를 승계했다.

초당 허엽의 아들인 교산 허균이 삼당시인(三唐詩人)의 대표자인 손곡 이달의 시집 서문을 쓴 것이 있다. 여기서 허균은 한 시대의 대방가(大方家)로 사가 서거정, 점필재 김종직, 허백당 성현을 손꼽았다. 최고의 비평가였던 허균이 성종조의 수많은 인물 중에 이 세 사람을 최고로 꼽았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문장가뿐만 아니라 문학 평론가로도 이름 높았던 계곡(谿谷)

장유(張維) 역시 선조 때의 최고 문장가인 간이(簡易) 최립(崔笠)의 문집 서문을 쓰면서 김종직, 김수온, 서거정, 성현 네 사람을 ‘대가’로 꼽고 있다. 주석으로 '성현과 서거정은 재질이 민첩해 관각체(館閣體)를 잘 지었다'고 달았다. 관각체란 예문관이나 홍문관 등의 관리들이 주로 쓰는 문체로 관각문학이라는 장르가 있을 정도였다. 당송 고문을 기본으로 하되 유장하고 통창(通暢)한 서술이 그 특징이다. 대책문(對策文), 사대교린(事大交鄰)의 외교문서(表箋) 따위에 널리 쓰이는 당대 일류 문체다. 이러한 성현의 문학은 이후 등장한 사림파(道學派)로부터 문장의 기교에만 치우친 ‘사장파(詞章派)’로 공격을 받는 빌미가 됐다.

그가 남긴 시는 조선 초의 악부시(樂府詩)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나 항상 그대가 그리워(長想思)’라는 작품이다.

“늘 그대 상각하지만 생각해도 볼 수 없네요.

마음은 종이연처럼 바람에 떨리네요. 이 마음 돗자리라면 둘둘 말고 돌이라면 굴리기라도 하겠지만, 답답한 이 마음 언제나 사라질까요? 그리운 님 저멀리 하늘 끝에 계신데, 구름 덮인 하늘 아래 푸른 숲만 아득한 걸요. 아득하여 다함 없는 근심으로, 나홀로 이렇게 악기를 타고 있어요···.”

허백당의 가문은 작은아버지인 성봉조(成奉祖)가 성종 대에 좌리공신으로 참여하여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그 형제와 아랫대에 이르러 극성을 이루었다. 백씨인 안재(安齋) 성임(成任)이 쓴 글을 보면 ‘문과에 다섯 아들이 급제하고 부모가 살아 있으면 쌀 20석을 준다’는 것을 예로 들며, 자신의 집에도 자신이 문과 중시와 발영시에, 그리고 아우인 진일재(眞逸齋) 성간(成侃)이 문과에, 막내아우인 성현이 문과와 문과 중시, 발영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니, 그렇게 보면 3형제가 6번의 문과에 합격한 셈이라 그런 상을 받을 만하다고 농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현의 셋째아들은 문과에 올라 좌의정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부자 간에 대제학을 지낸 것을 두고 ‘국조(國朝)의 문형가(文衡家)’라고 세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성임의 아들 성세명(成世明) 역시 문과에 급제했다.

이 가문 사람들은 글씨에도 뛰어났다. 그 대표자는 성임이다. 그는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현판을 쓴 당사자다. 성임은 인왕산 자락에서 원림(園林)을 조성하고 신선처럼 살았다. 이들 형제들은 음악에도 조예가 있었다. 허백당은 말할 필요도 없고 두 형제 모두 음률에 정통했고 거문고를 다루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진일재 성간은 독서광(讀書狂)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15세에 사마시에 합격한 것도 독서 덕분이다. 다만 30세에 요절한 것이 못내 아쉽다. 성현의 셋째아들 성세창은 글씨, 그림, 음률에 모두 정통해 당시에 ‘삼절(三絶)’이라고 불렸다. 성세창이 시를 쓴 계회도가 보물(제868, 869호)로 지정되어 전한다.

성현이 편찬한 많은 저술 가운데 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이란 책이 주목된다. 이 책은 일종의 정치비평서로, 부휴자라는 가공인물을 내세워 정치, 사회,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논설을 펴고 있다. 부휴자는 유가(儒家) 뿐만 아니라 도가 등 제자백가 사상을 거침없이 토해내는데, 이를 미루어 조선 전기 사회가 사상적인 면으로는 매우 역동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2004년에 번역 출간됐다.

허백당의 저술 중 백미는 단연 . 제목에서 알 수 있는 바 문장, 시, 그림, 인물, 역사적 사건 등과 관련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주옥 같은 수필이 있고 급소를 찌르는 삶의 지혜나 질펀한 남녀 간의 이야기까지 모두 담았다. 그래서 세상사로 지칠 때 그저 아무곳에서나 펼쳐 보다가 그만두어도 좋을 옛 친구 같은 책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성현의 졸기를 읽어보았다. 그 말미에 “성격이 허심탄회하여 수식을 하지 않으며, 생업을 일삼지 않고 오직 서적을 가지고 놀았다. 문장이 건실 익숙하여 오랫동안 문형(文衡, 대제학)을 맡았는데 허백당집 등 저서가 있다. 또 음률에 정통하여 늘 장악원(掌樂院) 제조(提調)를 겸하였는데, 다만 관리의 재간이 없고 사정에 소활(疎闊)하여 어디서나 큰 공적이 없었다.”

앞에서 소개한 선풍도골의 인물평과 일맥상통하는 기록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한 이후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제학, 우승지, 형조참판, 강원, 평안, 경상 관찰사, 한성부 판윤, 사헌부 대사헌, 예조, 공조 판서, 홍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등 직을 두루 역임한 바 있지만 관료로서 큰 공적이 없다는 평은 뜻밖이다. 성현이 54세(1492년, 성종23) 때 중국 사신 동월(董越)이 사신으로 왔을 때 시로써 창수한 일이 있었다. 이에 중국 사신은 그의 문재(文才)와 인간미에 반해 귀국 후 중국에서 조선 사신을 만날 때마다 안부를 물었다 한다. 여기서도 문학적 재질과 아울러 인간미가 함께 거론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어린 시절 풍광을 최고로 쳤던 인왕산 중턱에서 살았다. 그곳은 증조인 성석인 이래 성엄, 성념조를 이어 백형인 성임이 대를 이어 살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그 이후 지금의 서울 남대문 서쪽 1리 정도인 약현(藥峴, 오늘의 서대문구 중림동 일대) 어귀에 살았다. 이곳은 한양으로 수도를 정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길지임을 알고 성 씨에게 점지해준 곳이라 전한다. 성현은 이곳에서 밤에 홀로 언덕에 올라 시를 외웠고 눈 오는 달밤에는 거문고도 탔다. 그 후 이 집터는 200여 년을 대물림 되다가 약산(藥山) 오광운(吳光運, 동복 오씨, 1689-1745)에게 전해졌고, 이를 약산의 제자인 번암 채제공(1720-1799)이 받아 맥을 이었다. 명기(名基)를 명인(名人)들이 수수(授受)해 터전을 더욱 빛나게 한 셈이다.

허백당의 생애는 그의 제자인 모재 김안국이 잘 정리해 두었다. 사후 그는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의 삶이 온당하게 평가된 대목이다.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