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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장수 논개 유적지
380여 년 만에 찾은 논개의 묘, 백두대간 기슭에 꽃되어 잠들고…

백두대간의 유명한 고개인 육십령을 끼고 있는 장수는 주논개, 정경손, 순의리를 일컫는 삼절(三節)의 고을이다. 이 분들 중 임진왜란 당시 왜장 게다니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진 ‘충절의 여신’ 주논개(朱論介)는 1574년 백두대간 기슭의 장계면 대곡리에서 태어났다. 본래 생가가 있던 주촌마을이 저수지로 바뀌면서 좀 더 상류로 옮겨 유적지를 조성하고 복원하였다. 이곳엔 생가를 비롯해 논개 동상과 사적불망비각, 논개 유허비, 논개 부친의 묘소 등이 자리하고 있다.

개해 개월 개일 개시에 태어난 논개

논개는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 즉 개해 개월 개일 개시에 태어났다. 그래서 ‘사람이 아닌 개를 낳았다’고 해서 이름을 논개라 했다. 논개는 ‘낳다’의 이곳 방언인 ‘놓다’와 술(戌)의 ‘개’를 합한 ‘개를 놓다’라는 뜻. 어린 논개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 정도로 뛰어났고 이미 10세 때 고상한 기품을 갖추었다. 하지만 당시 서당에 다니는 또래의 짓궂은 장난이 그치지 않았다. 항시 말없이 묵묵히 견디던 논개는 어느 날 글귀 하나를 학동들에게 넘겨주었다.

‘꽃이 높은 가지에 있으니 사람이 꺾지 못하고 / 풀섶이 무성하니 개 다니기 어렵네(花高人不折 草盛狗難行)’

자신을 높은 가지에 핀 꽃으로 비유했고, 자신을 괴롭히는 학동들을 풀섶 헤치고 다니는 개로 비유한 시였다. 이후로 논개에게 희롱을 거는 아이들이 없었다 한다.

논개가 13세가 되던 해 논개의 앞날에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부친 주달문이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주색잡기에 빠져있던 논개의 숙부 주달무는 토호 김풍헌을 찾아가 자신의 놀이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논개를 넘기려는 계략을 꾸몄다. 김풍헌은 백치불구인 자신의 자식을 장가보내기 위해 논개를 민며느리로 사오는 대가로 논개의 숙부에게 논 세 마지기와 엽전 삼백 냥, 당백포 세 필을 주었다.

'충절의 여신'으로 불리는 논개 영정.
이 사실을 알게 된 논개 모녀가 친정으로 도망가자 주달무도 도망갔고, 김풍헌은 이들을 관아에 고발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주달무는 오히려 논개 모녀를 상대로 장수 현감에게 소장(訴狀)을 올렸다. 결과 ‘죄 없는 사람을 무고해서 괴롭히는 처사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이 났다. 논개 모녀는 무죄 방면됐다.

이때 판결을 맡았던 장수현감이 바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한 최경회(崔慶會, 1532~1593)장군이다. 오갈 곳 없게 된 논개 모녀는 드난살이로 현감 부인의 병수발을 했다. 하지만 곧 현감 부인은 세상을 뜨고, 논개는 최경회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이후 최경회가 고향에서 모친 시묘살이를 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가 된 최경회는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진주성 싸움에서 민관은 힘을 합쳐 싸웠지만 결국 성이 함락 당하자 최경회는 장수들과 촉석루에 모여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으로 ‘남강물 파도가 마르지 않으면 우리 혼도 죽지 않으리’라는 시를 읊고 남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그러나, 자결보다 복수를 택한 논개는 승전 축하잔치를 연 왜군들 틈으로 기생으로 변장하고 들어가 용맹하기로 이름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10여 일간 내린 장맛비로 물이 넘실대는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그런데 논개는 임진왜란 때 충신·효자·열녀를 뽑아놓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도 오르지 못했는데, 보수적인 사대부들은 논
논개 유적지에 복원해놓은 논개 생가. 원래 좀더 아래쪽이었으나 저수지가 생기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개가 관기라는 걸 트집잡았다. 허나 논개가 관기였다는 구체적인 기록이나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이는 1593년 6월 진주성 전투 때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 당시 상황이 잘못 전달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논개에 대한 최초의 문헌사료로 순국 28년 후인 1621년(광해군 13)에 쓰여진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은 논개의 행적을 자세히 알려주면서도 후대 사람들에게 논개가 기생이라는 인식을 고착화시켰다.

70년대 중반에 발견된 논개 묘소

현재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합장묘는 백두대간 육십령에서 동남쪽 10리쯤 떨어진 함양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 탑시기골에 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이 함락되자, 야음을 틈타 탈출한 의병들은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시신이라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남강 하류를 수색했고,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들은 고향 땅에 장사 지낼 요량으로 운구해오다 함양 고을 방지마을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잡아 장사지내고 돌아갔다.

구전에 의하면 부부의 시신을 옮겨와 주씨 문중과 장사지낼 것을 상의했지만, 왜적의 추격과 보복이 두려운 주씨 문중은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또 다른 구전에 의하면 당시 방지마을이 신안 주씨의 집성촌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논개가 묻힌 것이라고도 한다.

여하튼 장수와 함양 지역에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이 묘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30여 년 전인 1970년대 중반. 장수군의 의암사적보존회에서 십수 년 동안 문헌과 구전을 토대로 현장 탐문 조사와 향토사학자들의 고증을 거친 끝에 묘를 찾아낸 것이다. 논개가 순절한 후 380여 년만의 일이었다. 주논개 생가 관리사무소 (063) 352-2550, 350-2583.

여행정보

숙식 논개 생가 주변은 시골 마을이라 숙식이 마땅치 않다. 장계면 소재지 주변에 명성여관(063-351-0156), 하얏트모텔(063-351-1501), 귀빈모텔(063-351-0031) 등의 숙박업소를 비롯해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이 여럿 있다.

교통 경부고속도로→ 대전·통영간고속도로→ 장수 나들목→ 대곡리 주촌마을→ 논개 생가. 수도권에서 3시간 소요.




입력시간 : 2006/12/05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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