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종손 이상욱(李相旭) 씨, 선친 1·4 후퇴 때 실종… 불천위 등 제사 옛 법도 그대로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시조는 이알평으로 신라 좌명공신이었다. 그는 박혁거세가 왕이 된 후 아찬에 올랐다 한다. 경주 이씨는 14개파로 크게 나누어지며 백사 이항복 집은 상서공파에 속한다. 경주 이씨 출신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는 고려 시대의 익재 이제현과 조선 시대의 백사 이항복이다. 백사의 후손으로 저명한 이는 좌의정 이태좌(李台佐, 둘째아들의 증손자), 소론사대신(少論四大臣) 중의 한 사람인 이광좌(李光佐), 순조 때의 영의정 이경일(李敬一, 6대 종손) 등이 있다. 이태좌의 아들은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이다.

백사 이항복의 14대 종손 이상욱(李相旭, 1942년생) 씨를 처음 만난 곳은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加山面) 금현리(金峴里)에서였다. 그곳은 백사의 호성공신 사패지(賜牌地)로 백사의 영정각과 묘소, 신도비가 있다. 바로 옆에는 작지 않은 규모의 건물이 골조 공사를 끝낸 채 있었다. 건물의 용도가 궁금했다.

“문중 전시관을 짓고 있는데, 10년이 넘었지만 아직 완공하지 못했습니다. 형편이 되는 대로 짓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이곳은 유물 전시관과 종인들의 회합 장소로 쓸 생각입니다. 그래서 규모를 좀 크게 잡았어요. 모든 비용을 제가 마련하고 있어 공사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14대 종손 이상욱씨와 종부
종손의 이야기를 듣고보니 뜻은 깊지만 우산이공(愚公移山)과 같은 도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열심히 일하면 집 세 채 정도를 짓고 간다고 한다. 물론 개인 집이다. 그렇다면 지금 종손이 짓는 개인집 10여 채 규모의 건물은 종손 자부담으로는 힘에 벅차다. 그래도 종손은 가쁜 숨을 쉬면서도 이제 9부 능선을 넘어 완공을 눈앞에 두었다. 이런 일에는 내조가 필수적일 터. 개인의 편안함만 추구한다면 성사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함께 인사한 종부를 한참 바라보았다. 밝은 모습으로 문득 ‘부덕(婦德)’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참 인기 없는 단어이지만 가문을 지키고 씨족의 화목을 도모하는 데는 이보다 나은 덕목이 없다고 생각한다. 종부인 풍양 조씨(趙丙熙, 1946년생)는 충북 음성 주덕 출신으로 충북 민선 도지사를 지낸 이의 손녀라 했다. 넉넉한 마음과 지혜로움을 함께 가진 우리 시대의 종부요 어머니상이다.

종손은 한음 이덕형 종가와의 인연에 대해 언급했다.

“우리 집은 한음가(漢陰家)와는 세의(世誼)가 있어요. 저도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고요. 우리 어머니도 한음 종손의 어머니와 같은 풍산 홍씨예요. 유명한 모당 홍이상 선생 자손이지요. 그래서 특별히 친하게 지내셨어요. 제 외가가 혜화동에 있었는데, 한음 종손이 위당 정인보 선생의 따님인 정양완 씨의 제자였어요. 우리 집은 위당가와 친해서 한음 종손과도 친했죠. 우리는 말띠 동갑이기도 하구요.”

종손은 충청도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전에 서울 계동으로 이사한 뒤 창신동, 현저동, 재동 등지에서 살았다. 종손은 아버지와 같은 재동국민학교를 나와 한양중·고를 거쳐 한양대학교 전기과(61학번)를 졸업했다. 제대 후에는 줄곧 자영업에 종사했는데 73년부터는 선영 인근에서 목축업을 하기도 했다. 처음 만났던 금현리 양옥 주택은 당시 종손이 목장을 경영하면서 지은 집이다.

종손의 선고인 경우(卿雨, 1918년생) 씨는 2대 독자로 8세 때 부친(鍾逵)을 여의고 할아버지(圭桓) 슬하에서 자라다 11세 때 할아버지마저 여의는 아픔을 겪었다. 종순의 조부는 명석해 고종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조부가 고종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증조부께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집안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조부는 8세 때 참봉 벼슬을 받았다 한다. 영민했던 선친은 일가의 도움으로 제2고보(지금의 慶福高)를 나와 진명 출신인 홍희자(洪禧子, 종손의 모친) 여사와 결혼했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법정대(法政大) 경제학부를 마쳤다. 광복 이후 은행에 근무하던 선친은 일가인 이시영(李始榮, 1869-1953, 부통령)의 소개로 신흥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역시 일가인 이종찬 장군(1916-1983, 3군 참모총장)의 추천으로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했다.

“3사단 기갑부대에 근무하셨는데 9·28수복 후에는 계동 집에 다녀가시기도 했어요. 그러다 1·4후퇴 무렵 소식이 끊겼고 육본 기록에는 실종으로 처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망극한 일입니다.”

종손의 아픈 상처가 순간 드러났다. 당시 선친의 나이 34세, 종손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1·4후퇴 때 부친의 생사도 모르는 어린 종손은 백사의 신주를 어깨에 책가방처럼 메고 피난길에 올랐다. 종손의 4남매 중 막내 여동생이 부산에서 세상을 떠난 아픔도 겪었다.

백사 종가에는 불천위 제사를 비롯한 여러 제사를 옛 법도에 맞게 모시고 있다. 이 집은 여기에 더해 '생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음력 10월 15일 아침 묘소 앞 영당에서 모시는 생일 제사는 제수로 생미나리, 생무, 생두부와 호도, 밤, 은행을 껍질 그대로 쓴다. 특이한 점은 떡국으로 음복을 한다.

종손의 모친인 홍 여사는 교육 받은 신여성이었다. 그래서 일찍 남편과 헤어지고도 종가를 반듯하게 지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명가집 내림 손맛>이란 제목의 책자에 소개까지 되기도 했을 정도로 음식에도 조예가 있었다. 이 명가의 내림 손맛은 이제 현 종부인 풍양 조씨에게 대물림되었다. 종부는 이미 된장 맛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포천 오성대감 터전 한쪽에 전통 메주를 무수히 달아 둔 모습이 인상적이다. 춘삼월이면 이 메주도 종부의 손을 거쳐 맛나게 익어 된장이 될 것이다.

넉넉한 모친 '손맛' 대물림

종손에게 들은 홍 여사의 일화가 있다. 홍 여사는 이곳에서 멀리 않은 곳에 있는 반남 박씨 서계 박세당 종가와 인척관계에 있었다. 서계 종가는 아늑한 수락산 기슭에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 은행나무에서 딴 은행으로 자손들의 대학 등록금을 대는 것을 본 홍 여사는 은행 한 말을 가져다 모종해서 집 주변에 심었다.

그때가 손자를 본 해였다. 내심 손자의 등록금을 생각한 것이다. 그 뜻을 제대로 이루지는 못했지만 평생을 조상과 자손을 위해 살았다. “이제 제가 그 은행을 따서 문충공 선조의 생신 차례에 쓰고 어머니 기제사에도 올립니다.” 사려 깊은 노종부의 처사다.

재차 종손이 살고 있는 청담동의 한 아파트를 찾았다. 종가에서 백사 친필 천자문을 배관한 것은 가슴 뛰는 일이었다. 천자문의 마지막 장에는 정미년(1607, 선조 40년) 여름, 손자 시중(時中)에게 준다고 썼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50노인이 땀을 흘리며 힘들여 쓴 이 책을 함부로 던져버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는 점이다. 이는 퇴계 이황이 그의 손자 안도(安道)가 글자를 알기 시작했다는 아들의 편지를 받고 서울 우사(寓舍)에서 기쁜 마음으로 천자문을 쓴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백사가 손자를 위해 천자문을 쓸 당시는 52세였다.

백사는 이를 50노인으로 표현했다. 손자를 위해 정성을 다해 천자문을 쓴 심정은 시공을 초월해 공감되는 바로, 가문의 전통과 문화를 이어가려는 거룩한 장면이다. 이 책은 퇴계의 해서 천자문과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해서와 초서 천자문의 맥을 잇는 것으로 서예사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있는 사료다.

종손은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다. 차종손 이근형(李槿炯, 1973년생)은 한양공대와 동대학원을 나와 컴퓨터 회사에 다니며, 둘째아들 이관형(李冠炯, 1979년생) 역시 대학에서 기계설비를 전공한 공학도다. 큰 딸 이영란(李英蘭, 1974년생)은 이화여대와 동대학원(컴퓨터 전공)을 졸업해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한 작은 딸 이선미(李先渼, 1978년생)는 재학 중 행정고시를 합격해 현재 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항복 1556년(명종11)-1618년(광해군10)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동강(東岡),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시호는 문충(文忠), 봉호는 오성(鰲城)
임란 등 숱한 國亂극복 큰 공… 병조판서 5번 맡아

백사가 손자를 위해 직접 쓴 천자문
백사는 서울 서부 양생방(養生坊)에서 태어나 9세 때 부친상을, 16세 때 모친상을 당했다. 19세에 영가부원군 권율(1537-1599)의 사위가 된다. 권율은 임진왜란 7년간 조선 군대의 최고 지휘관으로 활약해 선무공신 1등에 책록된 이다. 권율은 사위보다 2년 늦은 1582년 식년문과에 급제해 임진왜란 내내 병조판서로 있던 사위인 백사의 지휘를 받았다.

사위도 난후에 호성공신 1등과 오성부원군에 책록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사위와 장인이 안팎에서 계획을 세우고 일선에서 실천해 미증유의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했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 한 분을 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이다. 현재 광주시 도청앞에서 발산교에 이르는 도로명 '금남로'는 그의 군호를 쓴 것이다. 그는 백사가 발굴해 가르쳐 후일 손아래 동서가 된 이다. 국난을 이들 세 사람의 옹서(翁壻, 장인과 사이)가 감당한 것이다.

백사의 일생을 통해 보면 세 가지 큰 시련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가 임진왜란, 둘째가 정응태 무고사건(1596), 그리고 마지막이 영창대군 사사(賜死)와 인목대비 폐서인(廢庶人) 사건이다. 백사는 이들 사건에 대해 온갖 정성과 지혜를 경주했으며 목숨까지 바쳐 구제하고자 했다. 임진왜란 때는 줄곧 도승지와 병조판서, 우의정을 맡으며 전란을 극복했다.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임란 못지않은 위기상황은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의 무고 사건이다.

정응태는 명나라 구원병 책임자로 와 있던 양호 장군과 마찰을 빚으며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나라를 침공할 것이다’고 허위로 보고를 했다. 만약 명나라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조선으로서는 망국으로 가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에 백사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 당시 공조참판)를 부사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을 서장관으로 대동하고 연경으로 건너가 원만하게 이 문제를 매듭지었다. 도리어 정응태를 파직까지 시키는 등 빛나는 외교성과를 거두었다.

끝으로, 계축옥사(癸丑獄事, 1613년)의 시련이다. 계축옥사는 광해군5년(계축)에 정인홍과 이이첨 등 대북파가 유영경 등 소북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무옥(誣獄, 거짓으로 얽어 만든 옥사)을 말한다. “소북파들이 선조의 적자(嫡子)이며 김제남의 외손자인 영창대군을 옹립해 광해군을 몰아내려고 한다”고 대북파들이 역적 문제를 제기했다. 이로 인해 김제남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해 증살(蒸殺, 삶아 죽임)함과 아울러 인목대비(仁穆大妃, 선조의 비, 김제남의 딸)를 서궁(西宮, 지금의 덕수궁)에 유폐시켰다. 당시 백사의 나이는 58세로 훈련도감 도제조와 체찰사 직에 있었다.

또한 그해에 평생 지기였던 한음 이덕형을 잃는 아픔도 겪었다. 43세에 우의정이 된 백사는 이미 십여 년간 정승의 반열에 있었음은 물론 호성1등 공신에 오성부원군에 책록된 국가의 원로대신이었다. 조정의 뜻있는 신하들과 재야 사림들은 모두 오성의 입장을 주시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계축옥사를 대해 백사는 입장 표명을 유보했다.

“나라에 장차 큰 일이 있을 것이니 그때가 내가 죽는 날일세, 만약 영창대군을 위해서 죽는다면 그것은 군자의 참된 용기를 손상하는 것일세.” 백사는 의미심장한 말만 되풀이했다. 예견대로 과연 국모를 폐위하는 반인륜적인 사건이 발발하자 비로소 글을 올려 극력 부당함을 간했고 광해군은 크게 노하여 아주 먼 변두리 땅으로 귀양을 보냈다. 광해군9년 11월 24일의 일이었다.

광해군은 국가의 원로대신이 정면으로 자신의 뜻을 거스르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계축년으로부터 4년 뒤의 일로 당시 백사는 62세(광해군9년)였다. 이때 중풍이 재발하여 반신불수의 몸이 됐다. 조정은 백사의 신병 처리에 당황했다.

광해군9년 12월 16일 백사를 위리안치시키라는 명이 떨어진 이후 17일 용강, 18일 흥해, 21일 창성, 24일 경원, 28일 남쪽의 다른 도, 28일 삼수로 오락가락하다 해를 넘겨 1월 6일에는 “대신이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변경에 둘 수 없다. 길주나 북청 등지로 고쳐 정하라”고 했다. 마침내 1월 6일 북청으로 유배해 그해 5월 13일 유배지에서 삶을 마감했다. 이에 국왕은 5월 18일에 이덕형의 예에 따라 관작을 회복시켜주고 예장을 함은 물론 경유지마다 관에서 운구에 협조할 것을 명했다.

“철령 노픈 봉에 쉬여 넘는 져 구름아/ 고신의 원루를 비사마 띄어다가/ 님계신 구중 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널리 알려진 백사가 지은 시조다. 철령(677m)은 광주산맥에 있는 고개로 북청 유배길에서 만났고 살아서 다시 넘지 못한 고개다. 이 작품을 읽노라면 떨어지는 외로운 신하(孤臣)의 원통한 눈물(寃淚)이 느껴진다.

야사를 보면, 백사는 국왕 선조에게 내밀하게 말 그림 한 장을 받은 적이 있다. 이는 후일 인조가 되는 능양군이 어린 시절 그려 국왕인 선조에게 올린 것이었다. 이를 가지고 있던 백사는 유배를 떠나면서 자신의 안부를 걱정하는 김유(1571-1648)에게 간수를 부탁했다. 김유는 말은 하지 않았어도 은밀하게 전하는 사연 모를 이 그림을 걸어두고 소중하게 다루었다.

하루는 반듯한 선비가 비를 피하느라 안채로 들어와 이 그림을 보았는데, 이 사람이 그림을 그린 당사자로 후일의 인조였다. 인조는 자신이 그려 선조에게 바친 그림을 보관하고 있던 김유에게 선조의 뜻이 전해진 것을 감지해 신임했고, 김유는 백사가 자신에게 전한 그림의 참 의미를 깨달아 인조반정을 주도했다. 김유는 후일 이귀 등과 협력해 반정에 성공했고 영의정과 정사공신1등에 올랐던 승평부원군이다.

엄동설한에 중풍까지 얻은 몸으로 불모의 땅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는 창졸지간에도 나라의 먼 앞날까지 걱정하고 그 방책까지 은밀하게 제시했던 63세의 백사는 분명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할 진정한 원로다. 이러한 모습을 계곡 장유는 백사 문집 서문에서, “천지 간에 간기(間氣, 특출한 정기로 주로 500년에 한 번 나타난다고 한다)를 타고난 존재다”라 했다.

오성과 한음의 일화는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오성이 활달하고 호기가 있었다면 한음은 차분함과 위엄을 갖추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두 사람은 조선 최고의 공직자며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중국 고사를 능가하는 오한지교(鰲漢之交)를 맺어 후대에 우도(友道)란 이런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들의 우도는 단순한 친목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를 통해 난세에 ‘중흥의 위업’을 이루었기 때문에 오늘까지 박수를 받고 있다. 5년 선배인 백사는 임진왜란 시기에 병조판서를 5번, 원수 1번, 체찰사를 2번 지냈고 한음은 병조판서 2번, 체찰사 2번, 훈련도감 제조 2번을 지냈다.

이들은 문장가로서도 나라에 기여했고, 아울러 어떠한 업무를 맡겨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했다. 이러한 능력의 소유자를 ‘통재(通才)’라 한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 인물이 이들과 서애 류성룡이다. 백사와 한음의 장인 역시 유명하다. 백사의 장인이 권율이고 한음은 북인의 영수 아계 이산해다. 절친한 친구인 백사가 한음이 세상을 떠난 해에 북인 정권 인사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그 몇 해 후 유배돼 쓸쓸히 세상을 마친 것은 얄궂은 운명을 곱씹게 한다.

한음은 20세에 문과에 급제하는데, 이때 이항복(24세)과 계은(溪隱) 이정립(李廷立, 1556-1595, 24세)이 동방이었다. 후대에 이들을 ‘경진삼리(庚辰三李)’라 하여 경진년에 급제한 세 사람이라 칭송했다. 벼슬길 역시 두 사람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음은 31세에 양관 대제학이 되었는데, 이는 대제학 최연소 기록이다.

병조판서는 백사가 한음보다 1년 앞선 37세 때였고, 그 이듬해에 33세로 한음이 그 직을 맡았다. 당시는 임진왜란이 발발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였다. 우의정은 한음이 6개월 빨랐고 영의정은 백사가 2년 빨랐다. 이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이들의 관계는 1613년 한음이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끝난다. 당시 백사는 58세로 북인 정권이 일으킨 계축옥사의 참담한 희생양이 되었다.

백사의 저술은 강릉(문하생들이 주도, 1629), 진주(정충신이 주도, 1635), 경상 감영(5대손 이종성이 주도, 1726)에서 각각 간행되었다. 현재 문집 15책이 남아 있다. 생애는 연보 및 계곡 장유가 쓴 행장과 상촌 신흠이 쓴 신도비명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백사가 살았던 서울 인왕산 줄기의 필운대(弼雲臺)에는 암각서와 함께 후손인 귤산 이유원(1814-1888)의 제시가 남아 있다. 현 배화여고 뒤뜰 암벽이다. 이 주변에는 생가터와 옹달샘 정자터 등이 남아 있다. 사후에 유배지인 북청과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에 있는 화산서원(花山書院, 경기도 기념물 제46호) 등지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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