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향보다도 더 진한 文字香 그리고 書券氣

내포평야의 나지막한 구릉에 터를 잡은 추사고택(秋史古宅). 풍수전문가들은 추사고택 터가 ‘문자의 향기(文字香)와 서권의 기운(書卷氣)이 감도는 명당’이라고 말한다. 즉 날카로운 바위산이 보이지 않는 대신 부드러운 언덕이 집터를 에워싸고 있어 문기(文氣)가 무르녹는다는 것이다.

1976년 복원한 80.5평 저택

조선 후기의 탁월한 서예가이자 실학자인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내포지방이 배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를 대성시켜 새로운 경지를 이룩한 추사는 서화를 통해 예술의 정수를 널리 떨쳤다. 또 추사는 함흥 황초령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고석(考釋)하였고, 북한산 비봉에 있는 비석이 이전에 알려진 것처럼 조선 초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냈던 금석학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백파(白坡)선사와 논쟁을 벌이며 조사선(祖師禪)에 대해 비판을 가할 정도로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추사 집안은 16세기 중반부터 가야산 서쪽 해미 한다리(서산군 음암면 대교리)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명문.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金漢藎, 1720~1758) 때부터 현재의 자리인 예산 용궁리로 옮겨 살게 된다. 명문가답게 학문과 벼슬에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충청우도암행어사·성균관대사성·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역경도 많았다. 55세인 1840년(헌종 6)에 풍양 조씨의 득세로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났고,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겨우 풀려났다.

어쨌든 월성위가 이 고택을 지을 때 충청도의 53군현이 모두 1칸씩 부조하여 53칸짜리 집을 지었다는 일화는 당시 월성위 집안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 원래는 정적들이 영조에게 한양 장동에 있던 월성위의 집이 너무 크다고 상소하자 이 집을 뜯어다가 건립한 것이라 한다. 현재 추사고택의 총 면적은 80.5평으로 안채, 사랑채, 문간채, 사당채가 있을 뿐이다. 명문가의 저택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하다. 1976년 복원할 때 사랑채와 안채가 붙어버린 왜곡된 형태로 지었기 때문이다.

사랑채 앞에는 오래 묵은 모란이 눈길을 끄는 작은 정원이 있고, 그 앞에는 1m 정도 높이의 돌 사각기둥이 있다. 이는 그림자의 길이로 시간을 알아보는 해시계로서 추사가 직접 제작했다 한다. 한쪽 면에 '석년(石年)'이라 새겨진 글씨는 추사의 글씨. 그러나 직접 쓴 게 아니라 나중에 집자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무엇보다 추사고택에서 눈에 띄는 건 주련(柱聯)들. 서예의 대가 집답게 수많은 주련들이 대문 옆, 현관 앞, 기둥, 바람벽 등에 주저리주저리 걸려 있다. 추사고택에서 천천히 이 주련들만 음미해도 그야말로 문자향과 서권기에 취할 듯하다. 역시 주련 읽는 재미는 빼놓을 수 없다. 주련 아래엔 각 글귀들을 번역해 놓은 조그만 설명문이 붙어 있어서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들도 그 의미를 거칠게나마 알 수 있다.

예서체 글귀엔 소박한 인생철학

이 중에서 안채 정면의 기둥에 걸려 있는 ‘대팽두부과강채 고희부처아녀손(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이라는 예서체 글귀는 유명하다. 해석하면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이요,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와의 만남이라’는 뜻. 이는 추사가 과천에 머물던 시절 71세로 세상을 떠나기 두세 달 전에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명작. 떵떵거리던 양반집에서 태어났으나 나중에는 온갖 풍파를 겪어온 추사가 인생의 의미는 소박하고 평범한 것에 있다는 진리를 깨닫고 있다. 또 ‘정좌처다반향초 묘용시수류화개(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 水流花開)’라는 글귀도 인기가 있다. ‘고요히 앉은 곳에 차는 반쯤 마셨는데 향기는 처음과 같고,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는 듯하여라.’

추사의 묘소는 고택 왼쪽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번잡스러운 석물로 치장되어 있지 않고 다만 생전에 남긴 글씨를 집자한 비석 하나만 있을 뿐인 묘소는 깔끔하다. 과천에 있던 것을 1930년대에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라 한다.

추사고택에서 300m쯤 거리에 있는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심은 나무다. 1809년(조선 순조 9) 10월에 부친 김노경을 따라서 중국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백송 종자를 필통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묘 옆에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추사고택 입장료는 어른 500원, 청소년 300원, 어린이 300원. 주차는 무료. 관리사무소 (041) 332-9111

여행정보

숙식 추사고택 주변에는 숙박시설이 없다. 덕산온천 주변에는 덕산온천관광호텔(041-338-5000), 덕산싸이판대온천(041-338-8862), 덕산스파캐슬(041-330-8000) 등 숙박업소 및 각종 음식점이 많다. 예산읍내의 소복갈비(041-331-2401)는 소문난 맛집이다.

교통 △서해안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사이에 있어 접근이 수월한 편이다. 서해안고속도로→ 당진 나들목→ 32번 국도→ 신암→ 추사고택. 서울→ 경부고속도로→ 천안 나들목→ 21번 국도→ 신암→ 예산<수도권 기준 2시간30분 소요> △예산행은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매일 8회(07:00~19:05), 인천종합터미널에서 매일 8회(07:55~18:40), 대전동부터미널에서 매일 27회(07:00~19:10) 운행한다. △예산→추사고택=예산터미널에서 매일 수시(07:50~21:05) 운행. 30분 소요. 예산터미널 041-333-2921~2

추사가 직접 심은 천연기념물 백송

글·사진 민병준 여행작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