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원 갇힌 싸이보그 바깥세상 주류들을 비웃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작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배우들의 숨은 노력은 잘 알려져 있다. 하나의 이미지로 자신의 연기 색깔이 규정되는 것에 대해 편집증적 거부를 보이는 배우들이 이미지 변신을 위해 들이는 노고만큼이나 감독들에게도 그런 고심이 있다.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이하 <싸이보그>)는 이런 고심의 흔적을 곳곳에서 드러낸다. <싸이보그>는 이전 박찬욱 영화와 모든 게 다르다.

대중문화 아이콘 '비'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했고 전작들처럼 원한과 복수가 횡행하는 핏빛 드라마와도 거리가 멀며, 심도 깊은 화면과 콘트라스트로 스크린을 불살라 버릴 듯했던 화려한 이미지의 향연 대신 파스텔톤의 안정적인 이미지가 주조를 이룬다. 필름 대신 바이퍼 카메라라는 HD 포맷으로 촬영했고 장르도 판타지 로맨스로 바뀌었다. 너무 급격해보이기는 박찬욱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충무로에서는 벌써 이 영화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싸이보그 그녀의 상상 세계

<싸이보그>는 정신병원이라는 비일상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판타지 로맨스다. 자신이 싸이보그라고 믿는 영군(임수정)은 신세계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형광등이나 자판기, 라디오와 대화를 나누는 등 자기 세계에 빠져있는 그는 일체의 식사를 거부한 채 건전지로 에너지를 충전하며 살아간다.

정신병원은 영군처럼 특이한 사람들의 집합소다. 지나치게 겸손한 나머지 어떤 사건이든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신덕천(오달수)과 신비한 양말을 신고 발을 비비면 공중으로 떠오를 수 있다고 믿는 왕곱단(박준면), 물건은 물론 사람의 마음이나 심성까지 훔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청년 일순(정지훈) 등이 그들이다. 어느 날 영군은 자신에게서 할머니를 앗아간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동정심’을 훔쳐달라고 일순에게 부탁한다.

일순은 싸이보그의 '칠거지악' 중 하나인 동정심을 훔쳐주고 병원에서는 영군의 거식증이 심각한 상태라고 경고한다. 일순은 점점 쇠약해 가는 영군에게 밥을 먹이기 위한 작전에 들어간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로 이어지는 복수 3부작을 통해 원한과 응징의 세계를 보여준 박찬욱 감독이 너무 착해진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싸이보그>는 생경한 느낌을 전해준다. 줄거리를 요약하기 힘들 정도로 드라마는 산만하게 전개된다. 분열증을 앓고 있는 환자들처럼 이야기 역시 분열증적이다.

<싸이보그>는 정신병원에 모인 사람들의 기이한 행동과 그들이 한 공간에서 모이게 된 내력, 그리고 영군과 일순의 정신적 교감을 묘사하는 에피소드들을 얼기설기 엮어 놓았다. 정신병원은 양가적 공간이다. 공간이 주는 폐쇄성과 다르게 그곳은 화사한 파스텔 톤의 아기자기한 장소들로 채워져 있다. ‘광인들만의 안정적인 보금자리’라는 생각이 드는 그 공간은 한편으로 어떤 반체제적 행동도 용인되는 해방구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금지와 명령, 복종에 의해 운영되는 규율의 공간이기도 하다.

잘못을 했을 때는 '독방'에 들어가야 하고 정해진 규율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강압적 질서가 작용하기도 한다.

'정상성'에 의문부호를 달다

급격히 달라진 박찬욱의 색깔에 대한 당혹감을 접어둔다면, <싸이보그>는 그리 생경한 영화만은 아니다. 증오와 복수라는 해결 방법 대신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대한 인정을 말하고 있을 뿐.

정상적인 세계에서 사는, 정상적인 인물들의, 정상적인 일상을 다루는 데 관심이 없는 박찬욱은 <싸이보그>에서 엉뚱한 공상의 세계에 거주하는 주인공들을 등장시킨다. 일견 우스꽝스러워보이는 이들의 행동양식은 모두 주류사회로부터 ‘비정상성’으로 재단될 것들이다. <싸이보그>는 정상과 비정상을 완고하게 구분하는 기준을 의문시한다. 정신질환 관련 서적 및 정신과 전문의들을 취재해서 만들어진 캐릭터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특정한 국면을 대표한다.

저마다 날을 세우고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바쁜 세상에서 ‘내 탓이오’를 연발하는 덕천이나 '절도'라는 반사회적 행위를 선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일순, 영군의 거식증과 대조적으로 너무 많이 먹는 여자 곱단 등에겐 세속적 가치를 한 박자 뒤틀어보고자 하는 연출자의 자의식이 묻어있다. 무엇보다 <싸이보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탈주의 욕망'이다. 정상성, 현실, 그럴듯한 것, 선악, 도덕률 등등의 제도화된 가치 기준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욕망은 '환자'로 불려지는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 보여진다.

정상성에서 벗어난 광인들의 무가치한 삶이라고 무시될 수 있는 그들의 꿈은 현실 바깥에 놓여있지만 영화는 현실과 상상, 허구와 리얼리티 사이의 경계마저 신경쓰지 않겠다는 투다. 통념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광인들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머리 속에 있는 상상들을 기어이 실현시키고야 만다. 손가락에서 다연발 기관총이 나간다고 상상하는 영군의 공상은 할머니를 앗아간 적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총기 난사로 실현된다. 영군과 일순은 곱단의 양말을 빌려 기어코 하늘을 날고 마는 것이다.

광기와 비정상성으로 단죄되는 비주류를 대표하는 인물 영군은 임수정이라는 걸출한 배우의 재능에 의해 생명을 얻었다. 영감이 가득한 그녀의 연기는 순수와 증오, 공포와 슬픔이 공존하는 이상한 나라의 싸이보그 소녀 영군을 동정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상상력의 경계를 두지 않는 판타지적인 장면들은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존중되어야 할 세계를 재현하고 있다. 제도와 법이 '정상'이라고 규정한 기준들에 무신경한 타자들에 대한 애정이 이토록 기발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문제작은 우리에게 없었던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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